[영국사] - 영국의 튜더왕조, 절대왕정과 대영제국의 기틀
영국의 절대왕정은 튜더왕조의 헨리 7세 대에 성립하였다. 당시 영국은 장미전쟁 이후 봉건귀족이 약화된 상태였고, 국민적 여론 또한 왕을 구심점으로 질서와 안정을 요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헨리 7세는 귀족의 사병제를 폐지하여 사적 무력을 금하고 국가 수입을 증대시켰다. 헨리 7세는 국민적 기반하에 왕권을 신장시키고 번영된 왕국을 헨리 8세에게 계승하였다.
헨리 8세는 선왕의 유지를 이어 받아 절대왕권을 확립시켰다. 튜더 정부는 중앙 정부를 개혁하고, 종교개혁을 단행해 로마로부터 교회를 독립시켰고, 수도원을 해산해 그 토지를 측근과 왕당파에게 나눠주었다. 이는 하나의 세속세력으로 굳어진 수도원의 세력을 약화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왕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던 의회도 있었으나, 튜더시대의 의회는 실권을 갖지 못한 왕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의회는 형식적으로나마 계속해서 소집되었고 그 명맥이 유지되었다.
헨리 8세의 뒤를 이은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 절대왕정과 르네상스의 정점에 이르는 발전상을 이끌어냈다. 여왕은 영국국교회를 확립하고 국민적 통합을 꾀하였고,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나 많은 구혼자들을 적절히 조정하여 국익과 외교에 탁월한 효과를 냈다. 특히 에스파냐 펠리페 2세, 신성 로마제국 황제 페르난디트 1세의 아들 등과 혼담이 오갔으나 실제로 결혼이 이루어지진 않았다.
엘리자베스 시대는 시장경제가 약동하는 시대였다. 여왕은 왕권은 돈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국고를 늘리기 위해서 경제 정책을 시행하였다. 당시 시행된 경제 진흥 정책으로는 양모를 활용한 모직물 산업이었다. 모직물 산업으로 국고가 늘어나는 것은 좋았으나, 농작지를 빼앗긴 농촌 빈민들이 도시로 모여들면서 새로운 문제를 낳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노동력은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의회는 여왕에게 순종했으며 경제는 계속해서 발전했고, 1600년에는 동인도회사가 설립되며 바다를 통한 해외발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일찍이 해상 패권을 장악하고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막대한 부를 가져오던 에스파냐와는 충돌이 불가피했다. 당시 영국은 해적을 이용한 사략선제도를 운용했다. 잉글랜드인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아메리카 대륙을 오가며 스페인 선박을 공격해 약탈했으며 30만 파운드에 달하는 막대한 재화를 여왕에게 헌납하기도 했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사략선이 에스파냐 상선을 노략질 하는 것에 불만이었는데, 영국의 가톨릭 신자 박해와 블러드 메리 사건, 드레이크의 노략질을 빌미로 영국에 무적함대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영국해군은 칼레해전에서 이를 격파하며 대영제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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