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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 유목민족사 역사 연표 (*23년 1월) BC 3500, 유목민의 등장과 말 BC 7C, 역사상 첫 유목민: 스키타이 BC 4C, 호(胡)와 흉노의 등장, 만리장성의 축조 BC 129, 흉노 제국과 한 제국의 전쟁 BC 126, 중앙아시아와 한나라, 타림분지의 국가들 BC 52, 흉노와 한의 관계변화, 호한야 선우와 왕소군 AD 48, 흉노의 2차 분열과 일축왕, 남흉노의 등장 AD 89, 북흉노의 서천, 그리고 흉노제국의 멸망 AD 1C, 유목민족 오환의 등장 AD 4C, 한인 왕조의 혼란과 몰락, 유목민족의 중원 이주 AD 4C, 중앙아시아의 새로운 패자, 유연의 등장 AD 6C, 돌궐 제국의 성장과 분열 AD 6C, 당나라와 돌궐제국, 돌궐의 서방정책 AD 657, 돌궐의 멸망과 새로운 돌궐 제국, 돌궐 2제국의 부흥(679 - 744) .. 2023. 1. 5.
[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체제와 공포정치, 피의 대숙청 [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체제와 공포정치, 피의 대숙청 스탈린이 정권을 장악한 1928년 이후 그는 정권 유지를 위한 대숙청을 단행했다. 이 대숙청은 당과 정부 그리고 국가에 대한 스탈린의 영향력과 권력을 보장해주는 도구였다. 스탈린의 사람이 아닌 1917년 이전의 볼셰비키파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몰로토프 같은 스탈린의 직속 부하 몇명을 제외하면 이름이 알려진 볼셰비키 지도자는 몇명 남지도 못했다. 이 대숙청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고는 권력을 잃고 결국에는 피살당한 트로츠키 외에는 스탈린 자신뿐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에는 스탈린의 절대적 개인독재가 시작되었다. 숙청의 기간은 길게보면 스탈린 집권 전체 시기에 해당하지만, 좁은 범위로 한정한다면 대숙청은 1937년부터 1년간 시행된 숙청.. 2023. 1. 4.
[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의 1920년대 외교정책과 치체린 [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의 1920년대 외교정책과 치체린 볼셰비키는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실현시킬 현실을 원했지만 그들이 차르정부로부터 물려받은 국제적 지위와 러시아의 국가적 이해관계는 그 이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소비에트는 제정 러시아가 맺은 조약과 채무를 거부하고 비밀 외교문서를 출판하는 등 과거 차르정부와의 단절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완전한 단절은 이루지 못하고 소련의 외교정택은 전통적, 민족주의적, 제국적 팽창이라는 방향성을 띄었다. 1920년대 소비에트의 외교정책은 치체린이 사실상 담당했다. 그는 1918년 트로츠키가 전쟁인민위원이 되었을 때, 그의 보좌관으로 근무했으며 곧 외무 인민위원이 되었다. 치체린은 그 직책에서 1930년까지 근무했다. 그는 볼셰비키가 아닌 맨세비키에다가 귀족출.. 2023. 1. 3.
[한국사] - 발해의 건국과 남북국시대의 시작 [한국사] - 발해의 건국과 남북국시대의 시작 나당동맹을 맺은 당과 신라의 공격으로 668년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걷는다. 이후 나라를 잃은 유민들은 각지로 흩어졌다. 자신의 부족에 속해있던 이들은 각자도생의 길로 들어섰고, 676년 이후 고구려의 옛 지역은 몇 부분으로 나뉘면서 고구려의 옛 영토는 이리저리 찢겨졌다. 대동강 이남 지역은 나당 전쟁 이후 신라가 확보하였다. 당과 인접한 북쪽 요동지역은 당에 귀속되었다. 그 밖에 만주 중부와 동부와 한반도 북부 지역은 영역상 당에 속하긴 했지만 거리가 멀고 관리가 어려운 탓에 상대적으로 당나라의 간섭이 덜했다. 이 만주 지역에서 말갈족이 당의 억압적인 통치에 반발하여 봉기하였다. 이들이 봉기하면서 요서지역에서 당의 권위는 크게 위협받기 시작했고, 그때를 틈.. 2023. 1. 1.
[러시아사] - 스탈린의 경제정책 - 제 2차, 제 3차 5개년 계획과 역사의 평가 [러시아사] - 스탈린의 경제정책 - 제 2차, 제 3차 5개년 계획과 역사의 평가 제 1차 5개년 경제계획의 성공이라는 자평에 말미암아 다음 계획들도 진행되었다. 1933년부터 1937년 까지 지속된 제 2차 5개년 계획과 독일의 공격으로 1941년 중단된 제 3차 5개년 계획은 1차때의 목표와 방법을 반복하는 계획이었다. 농업집단화를 이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국가의 인력과 자원을 최대로 동원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국민들은 경제계획이 진행되는 8년동안 전시상황과 같은 삶을 살아야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2차, 3차 성공이라는 연방정부의 발표를 들을 수 있었다. 제 2차 5개년 계획은 1차 계획보다 전문적으로 계획되어 생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복잡한 공작기계나 정.. 2022. 12. 31.
[러시아사] - 소비에트 러시아와 스탈린의 시대, 1932년 우크라이나 기근(홀로도모르) 사태 [러시아사] - 소비에트 러시아와 스탈린의 시대, 1932년 우크라이나 기근 사태 스탈린의 소비에트 통치는 1927년 제 15차 당대회부터 시작하여 약 25년간 지속되었다. 스탈린 시대는 엄청난 변화와 고통의 시기이기도 했으며, 대규모 강제적인 산업화가 있었고, 농업의 급작스러운 산업화가 있었다. 많은 인민은 스탈린 시대를 공포의 시대로 기억하며 스탈린의 적들은 숙청되고 처형당했다. 러시아사에 한 획을 그은 스탈린은 사실 출신성분이 훌륭하지 않았다. 1879년 그루지야의 신발 제조공의 아들로 태어난 이오시프 주가시빌리는 신학교를 다니다가 퇴학당한 뒤 사회민주당에 가입했다. 1903년에는 볼셰비키가 되었고, 몇차례의 체포와 유배형을 당했다. 그루지야의 볼셰비크가 레닌의 관심을 끈것은 그가 당의 자금 마련을.. 2022. 12. 30.
[한국사] - 삼국 통일전쟁과 신라, 나당전쟁의 승리와 통일신라 [한국사] - 삼국 통일전쟁과 신라, 나당전쟁의 승리와 삼국통일 6세기에 들어오면서 고구려, 신라, 백제 3국간의 전쟁은 계속되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7세기에 접어들면서 전쟁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642년에 새로이 즉위한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하여 국경의 성 40여 곳과 대성인 대야성까지 함락시켰다. 또한 주변의 작은 성들을 함락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지속적인 압박에 쇠퇴해가던 백제의 전성기를 찾는듯 했다. 이에 신라의 김춘추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구려의 평양성에 방문하여 대막리지 연개소문을 알현하였다. 신라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서 고구려와 일시적인 동맹을 맺고자 하였는데, 고구려가 동맹의 대가로 한강유역을 요구하자 협상은 결렬되었다. 고구려와의 동맹 실패로 고구려 남부전선에서 신.. 2022. 12. 29.
[러시아사] - 레닌 사후 소비에트 러시아의 권력투쟁, 스탈린의 등장과 경제 5개년 계획 [러시아사] - 레닌 사후 소비에트 러시아의 권력투쟁, 스탈린의 등장과 경제 5개년 계획 소비에트가 설립된 1920년대에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두가지 관점이 있었다. 첫번째 관점은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하는 좌파적 입장이다. 이들은 당과 국가의 적극적인 리더쉽을 통해 타 유럽국가에 비해서 후진적인 러시아를 빠른시일내에 선진화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좌파는 사회주의 권력이 농민대중에게 압도당하지 않으려면 급속한 산업화를 달성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적극적인 경제입안과 투자를 위해서 자본축적을 요구했는데, 이를 통해 임금과 가격인상을 국가에서 조절 할 수 있고, 이로써 농민과 민간부분을 통제할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은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원했고, 지방에서 당 비서를 임명하는 관행을 비판했다. 그리고 최대.. 2022. 12. 27.
[러시아사] - 적백내전의 승리와 신생 소비에트 러시아의 위기, 크론슈타트 반란과 신경제정책(NEP)의 시작 [러시아사] - 적백내전의 승리와 신생 소비에트 러시아의 위기, 크론슈타트 반란과 신경제정책(NEP)의 시작 볼셰비키가 적군으로 적백내전을 승리로 이끌어 전쟁을 종식했을때 소비에트 러시아는 폐허에 가까운 상태였다. 1920년과 1921년의 가뭄과 기근으로 국내외적 경제, 식량상황은 절망적이었다. 10월 혁명 이후 수년동안 전쟁, 처형, 기아, 경제의 붕괴로 인해서 2,000만명에 달하는 국민이 희생되었다. 거기에다 200만에 달하는 인원이 볼셰비키의 통치에 반대해서 러시아를 떠났는데, 여기에는 지식인과 기술자의 비율이 높았다. 볼셰비키가 실시했던 전시 공산주의는 러시아의 경제를 파탄내는데 한몫하기도 했다. 급박했던 정치상황속에서 정권을 연장하는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근시안적 시각에 펼친 제도였기에 결국.. 2022. 12. 26.
[러시아사] - 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운동과 소비에트 연방의 성립,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타 지역들 [러시아사] - 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운동과 소비에트 연방의 성립,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타 지역들 제 1차 세계대전 동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의 정치 형태는 크게 분열되었다. 전쟁을 통해 피폐해진 경제는 국민들의 정치성향을 급진적으로 만들었고, 연합국은 국민국가를 형성하라는 압박을 취했다. 결국 이 지역에서의 민족주의 운동은 자치권을 요구하는 것에서 독립을 하는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전제정이 종식된 이후 러시아 제국에 속했던 수많은 민족이 독립을 요구하고 나섰다. 1917년 핀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가 독립을 선언했다. 1918년에는 에스토니아, 우크라이나, 폴란드가 독립을 선언했다. 같은해 자캅카스 연방도 독립했다. 이들은 나중에 조지아, 아르메.. 2022. 12. 25.
[독립민수] - 안중근의 삶과 독립운동, 하얼빈 의거와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 주장한 이유. 안중근은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로,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다. 1. 독립운동 투신 이전 안중근(安重根) 선생은 어릴적부터 골격이 튼튼하고, 사격에 능하여 무골로 불렸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황해도에 이주하여 거주하였는데, 안중근도 황해도에서 출생하여 활동하였다. 안태훈과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일로 친분이 있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안중근에 대해 총을 잘 쏘는 청년으로 묘사하였다. 당시 김구는 안중근보다 3살이 많았으며, 동학의 접주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였고, 안중근은 동학군에 반하는 자경단을 이끌어 박석골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 일찍이 천주교에 영향으로 진남포에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등 교육사업에 투신하였으나, 1907년 8월 서울에서 대.. 2022. 12. 21.
[러시아사] - 소비에트 러시아 - 폴란드 전쟁과 리가 조약 [러시아사] - 소비에트 러시아와 폴란드 전쟁 1919년 2월부터 1921년 3월까지 1년여간 벌어진 소비에트 러시아와 폴란드의 전쟁은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벌어진 참극이었다. 폴란드의 지도자 피우수트스키는 발트지역에서부터 벨라루스를 거쳐 우크라이나에 이르는 독립국가를 폴란드와 연합시켜서 연방국가를 창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연방과 같은 국가를 다시 만들려는 시도로 보인다. 이에 소비에트 러시아는 이 전쟁을 통해서 공산주의 혁명이 서쪽에서 일어나게 되길 원했다. 러시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전쟁을 틈 타 적들의 내부에서, 특히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길 원했던 것이다. 1920년 무렵 러시아 적백내전에서 적군이 승기를 잡자 공산당 지도부는 폴란드가 서쪽이 공산화되는 시작점으로.. 2022.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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