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분류 전체보기261 [중앙아시아사] - 위구르 제국의 후예: 하서 위구르 [중앙아시아사] - 위구르 제국의 후예: 하서 위구르 위구르가 840년 키르기즈에 의해 멸망하면서 위구르의 유랑민 집단은 크게 두가지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남쪽으로 이동한 남주파와 서쪽으로 이동한 서주파로 나뉘어진다. 남쪽으로 향했던 남주파는 외게테긴을 다시 카간으로 세우고 험한 고비사막 이남으로 향하였다. 남주파는 고비사막 이남에서 다른 위구르 세력을 규합했다. 당시 남주파의 세력은 어림잡아 인구 100만명에 해당했다. 위구르인들은 하나의 세력을 이루어 당에 식량을 우선 요구했고 수많은 위그드인이 몰려오자 당은 이들의 항복을 요구하며 대치하였다. 당으로서는 칸까지 포함된 정치집단의 등장이 반갑지 않았으니, 당연한 조치였다. 그러나 곧 당은 843년 이들의 본진을 공격하여 위그드인들을 몰살시켰다. 이러한.. 2022. 5. 8. [중앙아시아사] - 위구르 제국의 번영과 멸망 [중앙아시아사] - 위구르제국의 쇠락과 멸망 위구르 제국의 2대 카간인 카를륵 카간에 이어 759년 즉위한 뵈귀 카간은 20년간 당 왕조에 대한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중국의 풍부한 물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물질적 풍요는 위구르제국의 정치적 안정에 기여하였고 카간의 권위는 건재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 들어온 물자는 위구르 내부의 정치적 안정뿐 아니라 제국으로 여러 부족들을 거느리는데 필수적인 역할을 하였기에 위구르제국의 번영에는 당의 물자가 필수적이었다. 3대 뵈귀 카간의 치세에 이어 그의 후계자인 알프 쿠틀륵 빌게 카간 역시도 위구르 제국을 잘 번영시켜나갔다. 그러나 4대째인 빌게 카간이 789년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위구르 제국은 위기를 맞이한다. 빌게 카간이 예상밖에 빠르게 죽자 .. 2022. 5. 6. [중앙아시아사] - 위구르 제국의 등장과 당나라, 돌궐의 멸망과 안록산의 난 [중앙아시아사] - 위구르 제국의 등장과 당나라, 돌궐의 멸망과 안록산의 난 위구르 제국은 투르크계 유목민인 칙륵의 후예이다. 칙륵 또는 철륵으로 불리는데 이는 수레를 뜻한다. 이들은 바퀴가 높은 수레를 이용하여 유목을 했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605년 서돌궐의 지배 하에 있던 칙륵이 세력이 커지자 서돌궐의 카간은 칙륵의 수령들을 급습하여 죽여 세력을 억제했다. 그러자 칙륵에 속하던 부구, 통라, 위구르, 바이쿠르등이 모두 스스로를 위구르라고 칭했다. 이들은 셀렝게 강 부근에 살았으며 인구 10만에 병사의 숫자가 5만을 헤아렸다. 이 기록에 따르면 7세기 초에는 톈산 방면에 살던 투르크계 유목민 집단이 서돌궐의 공격으로 동북방 셀렝게 유역으로 이주하면서 위구르를 중심으로 세력화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2022. 5. 2. [중앙아시아사] - 이슬람과 당의 격돌, 탈라스 전투 [중앙아시아사] 이슬람과 당의 격돌, 탈라스 전투 무하마드가 박해를 피해서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헤지라(622년) 이후 세력을 키우던 이슬람 세력은 중앙아시아로 진출을 꾀했다. 정통 칼리프시대가 4대 시아알리를 마지막으로 661년에 마감되고 술탄을 위시한 우마이야 왕조가 건립되며 이슬람의 동방 진출은 시작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옮기고 동쪽진출을 시작했다. 중앙아시아의 상업적 성격이 짙은 도시국가들을 공격하여 공물을 통한 물자 획득에 열정적이었다. 그리고 697년 하자즈 이븐 유스프가 바스라 총독에 임명되면서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이들은 동쪽으로의 정복전쟁을 통해서 이슬람 내부에 쌓여있는 종족적 갈등을 외부로 돌려 발출해내고자 했다. 이슬람 세력은 먼저 부하라 인근 도시 바이칸드.. 2022. 4. 29. [중앙아시아사] - 토번왕국의 등장, 당의 서역지배 당은 서돌궐을 복속시키고 타림분지 도시국가들을 장악하면서 서역지배를 완성하는듯 했으나, 다시금 세력의 도전에 직면해야했다. 티베트 고원에 위치한 토번 왕국이 그 주인공이다. 중국의 기록 속에서 토번으로 나오는데 토번은 티벳을 옮겨 기록한것이다. 토번 왕국은 7세기 티베트 라싸를 중심으로 건설되어티베트 고원지대의 여러 민족들을 흡수통합하면서 9세기 중반까지 국가의 명맥을 유지했다. 토번 왕국의 건설자는 송첸감포였는데 그는 고원을 통일한뒤 634년 당나라와 접촉하였다. 그는 선비족 탁발부의 후예로 당나라 공주와 혼인하여 국격을 높이려했으나 주변 유목민인 토욕혼의 방해로 성사되지 않았다. 하여 송첸감포는 636년 군대를 이끌고 토욕혼을 정발하고 당항, 백란등의 유목부족들을 차례로 정벌하였다. 이후 당의 서.. 2022. 4. 21. [중앙아시아사] - 돌궐 2제국의 부흥 (679 - 744) 당에 멸망하기전 돌궐인들은 비석에 자신들의 문자인 투르크 문자를 새겨 기록을 남겨두었다. 돌궐의 기록에는 중국의 위험에 대해서 경계하는 모습과 당이 돌궐을 지배 했던 50여년 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또한 돌궐이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뤄야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당은 동돌궐과 서돌궐을 차례로 격파하며 영토를 넓혀 서역지배체제를 완비한다. 당에 복속한 돌궐에 대해 당은 간접 지배체제로서 돌궐의 수장들을 내세워 구 돌궐제국의 영토를 통치한다. 서돌궐이 당에 멸망한 657년 이후 약 20년 뒤인 679년에 내몽골에서 당의 통치에 참지못한 돌궐 수령들이 합심하여 반란이 일으킨다. 아사나가문의 니숙복이라는 인물이 칸에 올라 구심점이 되자, 주변 24세력의 돌궐 수령.. 2022. 4. 19. [중앙아시아사] - 당과 돌궐제국, 돌궐의 서방정책 새롭게 몽골초원에서 흥기한 돌궐은 제국을 세웠다. 흉노와 달리 돌궐은 영역이 넓어 서쪽 카스피해까지 미쳤기 때문에 당시 서아시아에 존재하던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물론이고 그 너머 비잔티움 제국과도 관계를 맺었다. 돌궐제국은 사산왕조와 연합해헤프탈 훈족을 멸망시키고 아무다리야강을 기점으로 서로의 영토를 분할 하였다. 이로써 돌궐제국은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돌궐은 초원길을 통한 비단무역을 두고 대립하였다. 돌궐제국은 사산왕조가 영유하고 있던 국제 교역로를 우회해서 이들이 가지고 있던 영향력을 빼앗고자 했다. 그리하여 교역로를 두고 돌궐은 페르시아를 거치지 않고 비단을 교역할 길을 찾기위해 노력하였다. 이때 돌궐의 눈에 들어온 나라가 바로 동로마제국, 비잔티움이었다. .. 2022. 4. 14. [중앙아시아사] - 돌궐제국의 성장과 분열 몽골초원을 장악하고 있던 유연은 6세기 들어 투르크계 돌궐의 도전을 받게되었다. 552년 투멘의 공격을 받은 유연의 아나괴 이 자살하면서 투멘은 돌궐을 건국한다. 몽골초원의 패자로 나타난 돌궐은 발음상으로는 튀르크로 불리우는 종족이었다. 앞서 초원을 지배하던 유연의 유력 계층은 몽골어를 쓰는 계통이었지만 이들이 나타나면서 몽골 초원은 투르크계열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초원을 차지하게 되었다. 돌궐제국의 건국자는 중국측 기록에는 토문(土門)으로 기록되는데 이는 투르크 어에서 10,000을 뜻하는 투멘[tumen]을 옮겨 기록한 말이다. 아마 만명을 거느리는 만호장을 뜻하는 말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토문이 즉위한뒤 자신을 일릭이라고 칭했다. 투르크어에서 일[il]은 나라(國)를 의미하고 일릭칸은 나라를.. 2022. 4. 11. [중앙아시아사] - 중앙아시아의 새로운 패자, 유연 선비족의 뒤를 이어 고비사막 북쪽의 초원을 다스렸던 민족은 유연족이다. 유연은 기원후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초원에 국가를 건국하여 활동하였다. 3세기 전반에 선비족 연합체가 붕괴되고 우문부, 탁발부 같은 일부 선비 부족이 북중국으로 이주하였다. 비어버린 초원을 '칙륵'이라는 투르크 계통의 유목민족이 이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웠다. 유연이라는 국명은 4세기 전반 거록회라는 인물이 몽골 초원에 잔류하던 선비계 유목민들을 규합하면서 사용되었다. 이들은 여여나 예예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유연의 남쪽에 국경을 맞댄 북위는 비하의 의미로 연연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당시 화북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북위의 도무제는 4세기말 유연에 대하여 군사적 원정을 감행하여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군사적 압박속.. 2022. 4. 8. [중앙아시아사] - 중국 한족 왕조의 몰락과 유목민족의 중국 이주 [중앙아시아사] - 한인 왕조의 혼란과 유목민족의 이주 후한 말의 환관들이 난입하는 혼란한 정치상황과 대내외 적인 군사 충돌로 인해 중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후한이 몰락하던 2세기말부터 중국대륙의 패권을 놓고 서로 다투던 위, 촉, 오는 280년이 되에서야 진이라는 새로운 나라에 의해 혼란을 끝낸다. 진은 촉한의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낸 위나라의 대신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이 건국하였다. 건국 초기에는 어진 정치로 새로운 국가를 다져나갔으나 2대 혜제대에 이르러서는 나라의 기강이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2대 황제인 혜제때에는 이러한 혼란에 말미암아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던 왕들이 8왕의 난을 일으키고 국운이 기울게된다. 약 16년간 일어난 반란에 변경방비에 틈이 생기자, 만리장성 이북에 거주하던 유목민족들이.. 2022. 4. 7. [중앙아시아사] - 동호의 후예, 유목민족 선비족 [중앙아시아사] - 동호의 후예, 유목민족 선비족 본디 선비는 동호에 속한 부족이었다. 그러나 흉노족 묵특선우에게 공격을 받고 동호는 두 갈래로 나뉘어 이주하였는데 이 두갈래가 오환과 선비로 나누어졌다. 눈강 상류의 산악지역으로 들어간 동호는 선비족이 되어 역사에 기록되었다. 발음의 음가값이 [세르비 : Servi]에 가까웠기에 기록에 선비로 옮겨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1세기 중반 선비는 오환이 한나라의 영향권 아래의 지역으로 이주하자 오환 거주하던 초원지대를 자신들이 채우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동으로는 내몽골에서부터 서로는 주천과 동황에 이르기는 넓은 영역을 관할하였다. 이는 곧 선비족이 중국 북변에 넓게 분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비족은 기본적으로는 후한의 울타리로서 오환 편에 서서 북흉노의 공격.. 2022. 4. 6. [중앙아시아사] - 유목민족 오환의 등장 [중앙아시아사] - 유목민족 오환의 등장 유목민족 오환의 이름은 본디 동호였다.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흉노의 선우 묵특의 공격으로 동호가 근거지에서 쫓겨나 이동하였는데, 이들이 도망하여 자리잡은 와환산과 선비산에서 살게 되어 오환과 선비가 생겨났다. 이 기록을 따르면 기원전 3세기 말 몽골 초원 동남부에 거주하던 유목민족이 흉노 묵특의 공격으로 동북쪽으로 이주하면서 싱안링 상맥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세력이 바로 오환이 된다. 한나라 한무제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당시 랴호허 유역까지 남하해있던 오환을 상곡, 어양, 우북평, 요동, 요서등 5군으로 나누어 거주시켰다. 그리고 관직으로 호오완교위를 임명하여 이들을 관리, 감독하여 힘을 키우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오환의 수령들에게 연 1회 한나라.. 2022. 4. 5. 이전 1 ··· 18 19 20 21 22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