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

[일본사] - 세키가하라 전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등장

Timemapcatographer 2025. 2. 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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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전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등장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는 1600년 10월 21일(게이초 5년 음력 9월 15일), 미노국 후와군 세키가하라(현재의 기후현 세키가하라정)에서 벌어진 일본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도요토미 정권의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내전이었다. 이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과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한 서군 간의 격돌로, 일본 전국시대의 종결과 에도 막부 성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전투의 배경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을 통일한 후, 오대로(五大老)와 오봉행(五奉行)의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하여 자신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후견을 맡겼다. 그러나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오대로 중 하나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다이묘 간의 혼인과 동맹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영향력을 강화했다. 이에 대항하여 오봉행 중 하나였던 이시다 미쓰나리는 반도쿠가와 세력을 규합하며 갈등이 심화되었다.

1600년,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군사 동원 문제를 계기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서군을 제압하기 위해 군을 동원하자, 이시다 미쓰나리는 이에 대항하여 거병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 전국의 다이묘들은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대결하게 되었다.

양군의 구성과 전력

  • 동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총대장으로 후쿠시마 마사노리, 이이 나오마사, 마쓰다이라 다다요시, 도도 다카토라, 구로다 나가마사 등 약 82,000명.
  • 서군: 모리 데루모토를 명목상의 총대장으로 하고, 실질적으로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지휘했으며, 우키타 히데이에, 오타니 요시쓰구,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시마즈 요시히로 등 약 104,000명.

서군은 지형적으로 유리한 학익진을 형성하고, 동군을 포위하는 형태로 진을 펼쳤다. 그러나 서군 내부의 불화와 일부 다이묘들의 배신 가능성은 전투의 변수로 작용했다.

전투의 전개

전투는 1600년 10월 21일 새벽, 세키가하라 지역에 짙은 안개가 끼면서 시작되었다. 동군의 선봉인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서군의 우키타 히데이에 부대를 공격하면서 개전되었고,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동군의 구로다 나가마사와 이이 나오마사 등이 서군의 중심을 돌파하려고 시도했으나, 서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전투의 중반부, 이시다 미쓰나리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와 모리 데루모토에게 참전을 촉구했지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우유부단한 태도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바야카와 부대를 향해 위협 사격을 가하였고, 결국 히데아키는 서군을 배신하고 동군에 가담하여 서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서군의 붕괴와 결과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서군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오타니 요시쓰구는 끝까지 저항했으나 패색이 짙어지자 자결하였고, 이시다 미쓰나리는 패주 끝에 포로로 붙잡혀 처형되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일부 병력을 이끌고 후퇴에 성공했으나, 서군의 대부분은 궤멸되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의 실권을 장악하고, 1603년 에도 막부를 개창하여 260년간의 평화 시대를 열었다. 한편 도요토미 가문은 이 전투 이후 세력이 약화되었고, 결국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완전히 멸망하였다.

전투의 역사적 의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일본 전국시대의 종결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이후 일본의 정치 체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하는 막번 체제로 재편되었다. 또한, 다이묘들의 충성과 배신, 권력 투쟁의 복잡한 양상이 이 전투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었으며,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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