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대원4 [중국사] - 유목민족의 국가 원의 멸망과 주원장의 명 등장 [중국사] - 유목민족의 국가 원의 멸망과 주원장의 명 등장 쿠빌라이가 대원을 선포하고, 중원을 통치를 시작한지 어언 100년이 흐르자 원나라의 통치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피지배계층의 대부분을 이루는 한족과 지배계층인 몽골족의 갈등, 몽골의 통치세력은 라마불교에 심취하여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고, 이는 곧 피지배계층의 부담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고 잇따른 자연재해와 기근으로 민생이 어려워지자 여기저기서 반란의 깃발이 일어났다. 중국 하남지방의 백련교 교주인 한산동과 유복통은 이러한 원말의 분위기를 간파하고 이용하였다. 이들은 백련교라는 종교를 이용하여 한산동이 송 휘종의 8대손이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렸으며, 한족 왕조의 정통성을 얻기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주모자 한산동은 .. 2024. 8. 16. [중국사] - 대륙을 휩쓴 몽골 제국의 완성과 새로운 울르스 [중국사] - 대륙을 휩쓴 몽골 제국의 완성과 새로운 울르스 바투의 원정군은 러시아의 원정 도중 갑작스럽게 철군을 결정한다. 철군 이유는 우구데이 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후임 칸의 회의인 쿠릴타이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우구데이 칸의 후임은 우구데이의 아들 구유크 칸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구유크 칸이 병사하게 되므로서 후임 칸을 둘러싸고 내부에서 균열이 생겼다. 혼란 끝에 선출된 몽골 제국의 4대 칸은 뭉케였다. 뭉케 칸은 즉위 직후 혼란에 둘러싸인 몽골 내부를 수습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갑작스러운 계승 혼란이 수습되자 몽골은 다시 대외 원정에 나섰다. 뭉케의 지휘 아래 지목된 공격지는 서아시아와 남중국이었다. 원정군 사령관은 자신의 동생인 훌레구와 쿠빌라이를 임명하였다. 1252년 두 방향의 원.. 2024. 8. 16. [중앙아시아사] - 몽골 다얀 칸의 등장과 몽골의 재통일 1453년 타이시에서 칸에 오른 에센은 소위 황금씨족, 즉 징기즈칸의 혈족이 아니었기에 칸에 오른 해 바로 피살된다. 칸을 자칭했던 에센이 살해되자 몽골 초원에는 명목적인 칸은 있으나 여러 부족들로 세력이 나뉘어져 유력 수령들이 서로 대립하는 혼전 양상이 펼쳐졌다. 이런 상황에서 몽골초원에 산재하던 다수의 유목민이 정치적 혼란을 피해 중국과 가깝고 땅이 비옥하여 가축을 먹일 풀이 풍부한 내몽골 오르도스 지방으로 모여들었다. 15세기 후반 부족의 수령 벡 아르슬란은 인근의 다른 수령들을 제압한 뒤 1475년 만두굴을 칸으로 옹립한다. 그리고 자신은 국정을 총괄하는 타이시가 되어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만두굴 칸은 허수아비에서 만족하지 않고, 곧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뒤 벡 아르슬란을 축출한다. 만두굴 .. 2022. 7. 23. [중앙아시아사]- 몽골 제국 왕권 계승 전쟁의 종식 징기즈칸의 손자이자 툴루이 계의 적통인 쿠빌라이칸은 1260년 몽골제국의 5대 칸에 올랐고, 대원제국을 설립했다.1271년의 일이다. 쿠빌라이 칸은 재위 내내 제국내의 반란에 시달려야했다. 앞선 1260년 즉위 당시 아릭부케와의 갈등으로 몽골 제국은 왕권 계승전쟁에 휘말렸다. 쿠빌라이는 1260년 아릭 부케를 토벌한다고 선언하고 그해 6월 아릭 부케의 세력 일부를 쓰촨성 부근에서 제거하였다. 또한 자신의 정통성을 과시하며 자신이 적법한 계승자임을 발표했다. 아릭 부케는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고 쿠빌라이를 비난했다. 두 세력은 계속해서 카라코룸을 두고 격돌 했으며 이 일대는 황폐화 되었다. 또한 싱안링 산맥 울루스들의 맹주 나얀은 쿠빌라이가 일본 원정을 추진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징발과 통제를 강화하고.. 2022. 6. 17. 이전 1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