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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사/미국사

[미국사] - 미국 독립혁명의 시작과 미합중국의 설립

by Timemapcatographer 2023.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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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 미국 독립혁명의 시작과 미합중국의 설립

 

영국에서 청교도들은 카톨릭 신앙을 가진 스튜어트 왕조대에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그들은 왕조의 전제정치와 종교적인 탄압을 피해서 새로운 땅인 아메리카로 이주하였다. 청교도와 함께 일부 경제적인 이득을 위해 이주하는 모험가나 경영인도 있었다. 이들은 힘겨운 정착과정을 거쳐 북아메리카 동해안 일대에 13개의 식민지를 건설하고 정착하였다. 

 

영국의 13개 식민지는 각기 사정은 조금씩 달랐으나, 오히려 유럽에 비해서는 신분적, 경제적으로 매우 차이가 없었다. 부에 대한 경제적 기회도 충분하였고 사회적 유동성도 활발하였다. 영국은 이러한 식민지에 대해서 다른 식민지들과 마찬가지로 총독을 파견하고 관리하였다. 그러나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실제 정치는 총독보다는 식민지 의회와 그 상류층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식민지 의회는 유럽 대륙 어느 곳보다 큰 권한을 갖고 있었고, 1760년까지 계속된 총독과의 권력투쟁으로 인해서 식민지 의회는 식민지에서 자유와 자치라는 큰 가치를 누리게 되었다.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해서 커다란 간섭없이 일정부분 자치를 허용해왔다. ‘건전한 방임'으로 불리는 이 정책은 경제적 통제나 종교 등에 관련하여서 본국의 법률을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 본국의 상황이 나빠지면서 이러한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1763년 유럽에서 7년전쟁이 끝나면서 재정적 궁핍에 시달리게 된 영국은 식민지들의 경제정책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없었던 과세와 중상주의적 통제는 식민지인들에게 낯선 것이었으며 이는 반발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1760년에 즉위한 조지 3세는 선왕들과는 달리 매우 권위적이었고, 7년 전쟁의 전쟁비용과 신대륙의 방위비를 식민지로부터 각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는 여러 과세법을 나타났는데 대표적인 것이 설탕법, 인지법 등이었다. 신문과 책자, 카드 등 대부분의 서류에 붙는 세금인 인지법의 파장은 매우 커서 9개 식민지 대표들은 뉴욕에서 회의를 열고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는 원칙을 재확인 하기에 이른다.

 

인지법은 곧 폐기 되었지만 영국은 본국이 식민지를 통제할 법을 제정할 권리를 갖는 선언법을 채택하였다. 이로써 식민지 북아메리카와 영국 본국과의 본격적인 갈등이 고조된다. 본국의 의회에 대표를 파견하지 않고서는 식민지에 함부로 과세할 수 없다는 식민지에 주장에 영국 본국이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견해차이와 갈등이 드러난 것이다.

 

영국의회는 1767년 타운센트법을 통과시켜 차와 제지, 유리와 납 등에 과세하였다. 그러나 곧 강한 반발에 부딪혀 차에 대한 세금만이 남았다. 그래도 식민지 인들은 이것을 부당하다고 여겨 반발을 이어갔고 결국 1773년 보스턴 항구에서 동인도 회사의 차 상자가 바다에 버려지는 사건으로 갈등이 번지게 된다. 보스턴 차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태로 인하여 영국은 본보기로 보스턴 항구를 봉쇄하고 메사추세스 선거를 정지하는 등 강도 높은 보복을 취하였다. 

제 1차 대륙회의

 

본국과의 관계가 갈수록 갈등양상으로 치닫자 1774년 9월 식민지의 통신위원회는 필라델피아에서 대륙회의를 열고 영국의회의 입법권을 부정하며 영국 상품의 보이콧을 선언하였다. 결국 영국군이 파견되어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게되었다. 1775년 4월 보스턴 근교의 렉싱턴 지역에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가 충돌하면서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였다. 

1775년 렉싱턴 전투

 

영국과의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한 식민지 대표들은 1775년 5월 제 2차 대륙회의를 개최하여, 영국과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민병대를 정규군으로 공인하고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워싱턴은 보스턴 교외에서 식민지군을 조직하고 지휘했다. 군에 필요한 물자는 대부분 프랑스를 통해서 조달되었다. 그외에도 토마스 제퍼슨이 초안한 독립선언을 발표하여 독립의 이유와 타당성에 대해 발표하였다.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한 독립선언서 제출

본격적으로 독립전쟁이 전개되자, 영국을 지지하는 충성파와 독립을 원하는 애국파로 갈라졌으나 대부분은 애국파를 지지하였다. 여기에 독립선언이 공포되면서 유럽의 자유애호가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도 있었다. 전쟁 초기 워싱턴의 대륙군은 영국의 정예 병력에 의해 수세에 몰렸다. 영국의 하우 장군은 뉴욕시의 탈환을 위하여 군대를 배치했다. 워싱턴 장군 역시 요충지 뉴욕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롱아일랜드와 맨하탄에 2만의 병력을 배치하였다. 당시 워싱턴은 채택된 독립 선언서를 병사들에게 읽어주며 독려했다. 

1776년 롱아일랜드 전투

1776년 8월 롱아일랜드에 상륙한 2만 2천의 영국군은 롱아일랜드 전투에서 대륙군을 격파하고 워싱턴 휘하 부대를 브루클린까지 몰아냈다. 이들은 맨해튼으로 탈출했다. 9월에 하우 장군은 맨해튼과 뉴욕을 모두 장악했으며 워싱턴 장군의 대륙군은 워싱턴 요새까지 빼앗기며 패퇴를 거듭했다. 영국의 콘윌리스 장군은 워싱턴을 쫓아서 뉴저지까지 진군했고, 대륙군은 델라웨어 강을 건너 펜실베니아까지 후퇴했다. 계속되는 패배와 후퇴로 인해 대륙군은 5천여명의 피해자가 생겼다. 

엠마뉴얼 루체 작,  델라워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  (1851)

대륙의회는 계속된 패배에 필라델피아를 포기했다. 대륙군의 가용병력은 5,000명 미만으로 내려갔다. 대륙군의 복무 기간은 1년이었기 때문에 점점 병력의 수는 줄어들 형편이었다. 암울한 상황속에서 워싱턴은 해가 바뀌기 전에 공격을 감행한다. 크리스마스 밤에 영국군 몰래 델라웨어 강을 건너 급습하였다. 12월 26일 있었던 트렌턴 전투에서 천여명을 포로로 잡고 트렌턴을 점령하였다. 영국군 콘윌리스는 트렌턴을 탈환하기 위해서 진군해왔지만 워싱턴은 프린스턴 전투에서 콘윌리스의 허를 찔러 후위부대를 격파하였다. 

버고인 장군의 항복

워싱턴의 대륙군은 기세를 몰아 곧 1777년 9월부터 진행된 사라토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전황을 바꾸어 나간다. 캐나다에서 남하한 영국군 버고인 장군은 정규병 삼천명과 독일 용병 3,900여명, 캐나다 왕당파와 인디언 동맹군을 구성하여 워싱턴에게 대항하였으나 결국 항복하였다. 여기에 프랑스가 7년전쟁 이후 강대해지기 시작한 영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식민지 편에 1778년에 참전하고 에스파냐와 네덜란드가 가담하면서 영국은 점차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1778년 7월 27일 웨상 해전을 시작으로 도미니카 섬을 점령하고 카리브해에서 영국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실질적인 지원이 아니더라도 러시아를 비롯한 국가들은 무장중립연맹을 결성하여 영국에 대항하였고, 이는 영국과 유럽 전체의 지지를 받은 미국의 대결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영국은 곳곳에서 대륙군이 산발적으로 저항하고, 에스파냐와 프랑스가 참전하면서 전선이 무한정 확대되자 영국군을 한데 모아 요새화 하는 전략을 펼쳤다. 영국군의 새로운 수장인 헨리 클린턴은 대륙군을 무력으로 제압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뉴욕을 요새화 하고 그곳에서 항전하였다. 대륙군도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전쟁자금이 부족해서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영국군이 요새에 틀어박혀 있으니 공격할만한 여건이 보이지 않았다. 

요크타운의 항복, 존 트럼블 작, 1797

 

그러던 중 1781년 9월 5일 체서피크 만에서 프랑스 해군이 잠시 영국 해군을 밀어냈다. 제해권이 프랑스 해군에게 넘어간 사이 영국의 콘윌리스가 이끌던 요크타운 요새는 미국과 프랑스 연합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콘윌리스는 영국의 구원군이 10월 5일까지 도착하지 못하자, 콘윌리스는 항복해버렸고, 연합군은 1781년 요크타운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로 인해 영국은 전쟁 반대파가 우세해졌다. 조지 3세 시 전쟁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결국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을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1783년 파리조약을 통해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미국은 미합중국으로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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