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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6

[중국사] - 송나라의 중국 통일과 새로운 적, 거란 [중국사] - 송나라의 중국 통일과 새로운 적, 거란 예로부터 내륙 아시아 초원지대에는 수많은 유목민족이 거주하였다. 유목민족들은 말, 양, 염소, 낙타등의 가축을 기르며 중국의 북쪽 초원지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중국은 이러한 유목민들이 세력을 결집하지 못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며 관리하였는데, 중국이 혼란에 휩싸이게되면 유목민이 힘을 모을 기회가 생기곤 했다.10세기 초에 시라무렌 강, 랴호허 강 두개의 강 유역에는 거란이라는 부족이 있었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거란은 여덟부족이 연맹체를 구성하고 있었으나 9세기 후반 점차 통일의 기운이 일어난다. 당시 당은 황소의 난과 환관의 정치로 내부의 혼란에 신경쓰느라 변경에 위치한 거란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다. 거란은 이런 상황을 틈타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다.. 2024. 8. 22.
[고려사] -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과 북진정책, 거란과 전쟁 (1~3차 여요전쟁) [고려사] -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과 북진정책, 거란과 전쟁 (1~3차 여요전쟁) 고려는 국호에서 보여지듯 건국 초부터 고구려를 계승을 표방했다. 이는 적극적인 북진 정책을 국조로 삼는 기반이 되었다. 이에 따라 지금의 평양인 서경을 중시하고, 평양을 기반으로 하여 청천강 이북으로 영토를 확대하려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북진 정책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 일대에서 세력을 영유하던 거란에게는 무시할수 없는 도전이었다. 두 나라의 대립은 곧 갈등으로 나타났다. 거란은 스스로를 키타이라고 부르는 유목 민족이다. 거란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져있었는데, 당에 복속하였다. 그러던 중 당 말기의 혼란기에 질랄부에서 야율아보기라는 걸출한 리더가 나와 부족을 통일하며 거대 세력을 형성하였다. 또한 서쪽의 탕구트와 동쪽의.. 2023. 1. 17.
[고려사] - 고려의 민족통일과 고려 초 정세, 발해의 멸망 [고려사] - 고려의 민족통일과 고려 초 정세, 발해의 멸망 신라가 힘을 잃은 뒤 후삼국 시대가 열리자 상황은 후백제에 비해 고려에게 우세하게 돌아갔다. 930년 고창 전투에 이어서 934년 운주전투에서 후백제군은 고려군에게 패배하면서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갔다. 후백제 왕실 내부에서도 갈등이 일어났다. 견훤이 넷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면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더 고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동시에 926년 거란에게 멸망한 발해의 세자 대광현이 유민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하면서 고려는 발해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또한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내부의 분열로 큰아들 신검에게 피체되어 있다가 탈출하여 결국 숙적이던 고려에 의탁하였다. 나라를 세운 견훤이 상징성이 있었던 만큼.. 2023. 1. 14.
[한국사] - 발해의 건국과 남북국시대의 시작 [한국사] - 발해의 건국과 남북국시대의 시작 나당동맹을 맺은 당과 신라의 공격으로 668년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걷는다. 이후 나라를 잃은 유민들은 각지로 흩어졌다. 자신의 부족에 속해있던 이들은 각자도생의 길로 들어섰고, 676년 이후 고구려의 옛 지역은 몇 부분으로 나뉘면서 고구려의 옛 영토는 이리저리 찢겨졌다. 대동강 이남 지역은 나당 전쟁 이후 신라가 확보하였다. 당과 인접한 북쪽 요동지역은 당에 귀속되었다. 그 밖에 만주 중부와 동부와 한반도 북부 지역은 영역상 당에 속하긴 했지만 거리가 멀고 관리가 어려운 탓에 상대적으로 당나라의 간섭이 덜했다. 이 만주 지역에서 말갈족이 당의 억압적인 통치에 반발하여 봉기하였다. 이들이 봉기하면서 요서지역에서 당의 권위는 크게 위협받기 시작했고, 그때를 틈.. 2023. 1. 1.
[중앙아시아사] - 거란의 후예: 서요(西遼)의 등장 - 카라 키타이 [중앙아시아사] - 거란의 후예: 서요(西遼)의 등장 - 카라 키타이 흔히 불리는 ‘서요’ 또는 몽골인들이 부른 ‘카라 키타이’는 1125년 거란 제국이 여진에 의해 멸망하자 서방으로 이주한 거란세력을 일컫는다. 거란 유랑민의 지도자는 야율대석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기병 80~200명의 소수의 군대와 함께 인산 산맥을 넘어서 몽골 초원으로 피신했다. 톨라 강 유역의 상류에 과거 위구르 제국의 중진이었던 카툰성으로 가게 된다. 카툰성은 진주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이곳에 이른 야율대석은 카툰선 인근 7주의 장관과 18부의 수령들을 소집했다. 여기서 1만여명의 병력을 모았고, 그리고 거란제국의 강역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면서 단합을 호소 했고 상당수의 유목 군대를 소집하는데 성공했다. '서요'는 중국.. 2022. 5. 24.
[중앙아시아사] - 거란의 등장과 번영, 키타이제국 당나라의 명운이 쇠해져 가던 10세기 초 시라무렌 강과 랴호허 강 유역에서 살던 유목부족인 거란이 새로이 국가를 건설하였다. 동호와 선비 계열에서 갈라져 나와 4세기 경 자신들만의 세력을 구축했으며 내몽골 지역을 영유하였다. 10세기 초 당시 당은 정권말이여서 내부의 혼란에 몰두하여 국경 외곽 변경에 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고, 거란은 그러한 상황에서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다. 907년 당이 멸망함과 동시에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거란을 건국했다. 이들은 농경도 병행하여 반농반목적 생활을 영유하였고, 여진-만주족과는 별개로 더 유목민의 성격이 짙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란이라는 이름보다는 키탄 또는 키타이에 가까운 발음이었던 이 제국은 야율아보기라는 인물에 의해서 세워졌다. 야율은 부족의 명칭 또는 씨족 성으로.. 2022.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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