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징기즈칸4 [중앙아시아사] - 몽골 제국의 쇠퇴와 종말 [중앙아시아사] - 몽골 제국의 쇠퇴와 종말 세계를 호령했던 몽골제국의 세계지배는 사실상 14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붕괴하기 시작했다. 제국 붕괴의 조심은 본격적으로 지배체계가 무너지기 20~30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각 울루스에서는 칸의 권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차가다이 울루스에서는 1326년 케벡 칸이 사망한 뒤 극히 짧은 기간만을 통치하고 단명한 칸들이 줄을 이었으며 타르마시린 칸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폐위되기도 했다. 내부적인 갈등과 균열로 인해서 차가다이 울루스는 1340년대 후반 동서로 분열되었다. 훌레구 울루스 또한 마지막 군주 아부 사이드의 20년 치세동안 어느정도 안정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이는 권신들의 세력 균형을 위한 일시적인 안정이지 울루스 칸의 권력이 강해서가.. 2022. 7. 7. [중앙아시아사] - 몽골의 칸국: 차가타이 울루스 [중앙아시아사] - 몽골의 칸국들: 차가타이 울루스 징기스칸이 1207년 부터 1211년 자제 분봉을 실시해서 차가다이가 받은 최초의 봉지는 알타이 산지 부근이었다. 이 알타이 산지 부근에 받은 초봉지는 이후에 서방원정으로 크게 확장되어 알말릭과 쿠야스 부근에 다다르게 되었고 곧 사마르칸드와 부하라에 이르는 지역까지 모두 포괄하게 되었다. 차가타이는 징기즈 칸의 둘째 아들이고, 차가타이 칸국의 칸을 처음으로 자처한 훌레구는 그의 손자였으며, 차가타이 칸국의 제3대 칸이 되는 예수 몽케는 그의 아들이었다. 차가타이 울루스는 울루스들 사이에서 중앙에 자리잡게 되어 중앙 울루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차가타이 울루스의 이러한 입지조건은 몽골 제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변동에 계속해서 영향을 받았고 칸의 권력 안정.. 2022. 6. 20. [중앙아시아사] - 징기스 칸 사후 몽골제국의 권력다툼 징기즈칸은 1227년 대외원정을 가던 도중 사망하였다. 서하 원정 당시 사망하였고 위대한 칸의 죽음에는 다양한 설이 있으나 그것은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징기즈칸은 생전에 셋째아들인 우구데이를 후계자로 지명해두었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뒤 막내아들인 톨루이는 몽골의 관습에 따라 특수지위인 ‘화로의 주인’을 이용해 후계자가 되려고했다. 몽골족은 자식들이 커서 분가할 때마다 아버지에게 재산을 받아 분가하지만 막내는 마지막에 아버지의 남은 재산을 갖게된다. 이를 화로의 주인이라고 하는데, 이로인해 몽골은 말자상습이라는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말자상속은 아니고 남은재산을 모두 물려받는 전통이다. 막내 톨루이는 쿠릴타이 개최를 미루면서 까지 기회를 엿보았지만 징기즈칸의 유언을 묵살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 2022. 6. 2. [중앙아시아사] - 거란의 후예: 서요(西遼)의 등장 - 카라 키타이 [중앙아시아사] - 거란의 후예: 서요(西遼)의 등장 - 카라 키타이 흔히 불리는 ‘서요’ 또는 몽골인들이 부른 ‘카라 키타이’는 1125년 거란 제국이 여진에 의해 멸망하자 서방으로 이주한 거란세력을 일컫는다. 거란 유랑민의 지도자는 야율대석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기병 80~200명의 소수의 군대와 함께 인산 산맥을 넘어서 몽골 초원으로 피신했다. 톨라 강 유역의 상류에 과거 위구르 제국의 중진이었던 카툰성으로 가게 된다. 카툰성은 진주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이곳에 이른 야율대석은 카툰선 인근 7주의 장관과 18부의 수령들을 소집했다. 여기서 1만여명의 병력을 모았고, 그리고 거란제국의 강역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면서 단합을 호소 했고 상당수의 유목 군대를 소집하는데 성공했다. '서요'는 중국.. 2022. 5. 24. 이전 1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