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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사25

[프랑스사] - 메테르니히와 구체제의 부활, 자유주의 프랑스 7월 혁명 [프랑스사] - 메테르니히와 구체제의 부활, 자유주의 프랑스 7월 혁명 메테르니히가 틀어 막으려했던 자유주의, 민족주의는 물과 같아서 개인의 노력으로 막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가 독립을 달성하고 이듬해인 1830년 7월 파리에서는 자유주의 혁명이 발생하였다. 이를 7월 혁명이라고 한다.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이 실각한 이후, 프랑스 왕실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부르봉 왕실의 루이 18세는 입헌군주제를 규정한 1814년의 헌법을 선포했다. 이 헌법은 보수적이었으며, 유권자 수가 10만을 넘지 못하는 법이었다. 동시에 혁명이 끝나고 프랑스로 돌아온 귀족과 성직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프랑스에는 구체제, 즉 앙시앵레즘이 부활하게 되었다. 이들은 혁명으로 잃은 특권과 재산을 되찾을하였고, 자신들의 정치.. 2023. 6. 3.
[유럽사] - 산업혁명에 대응한 사상의 발전: 유럽 각국의 노동운동 (영국, 프랑스, 독일) [유럽사] - 산업혁명에 대응한 사상의 발전: 유럽 각국의 노동운동 (영국, 프랑스, 독일)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일어난 영국은 아이러니하게도 1800년에 제정된 결사금지법에 의해 19세기 초까지 합법적 노동운동이 불가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의 도입으로 노동자의 설 자리가 좁아지는 현실에 일부 노동자들은 1811년 부터 1816년까지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 운동을 벌였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악덕 고용주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저항을 벌였다. 영국의 노동자들은 결사의 자유가 없었으므로 이들의 행동은 조직화되지 못하였고, 결국 영국 당국의 강한 탄압과 고용주들의 반격으로 결국 이 시기의 노동운동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1824년 결사금지법이 폐지되면서 지하에 숨어있던 노동조합과 새롭게 결성되는 조합들의.. 2023. 5. 26.
[유럽사] - 산업혁명에 대응한 사상의 발전: 마르크스주의의 등장과 제 1, 2 인터내셔널 [유럽사] - 산업혁명에 대응한 사상의 발전: 마르크스주의의 등장과 제 1, 2 인터내셔널 1840년대 푸리에와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공상적이고 평화로운 방법으로의 평등공동체 건설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칼 마르크스는 자신의 동료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함께 혁명 사회주의를 제시하면서 사회주의의 성격은 급변한다. 칼 마르크스는 유대인 출신으로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파리에서 엥겔스와 만나 사회주의 혁명이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가 비약적인 생산력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부르주아지가 노동자의 노동에 합당한 가치를 지불하지 않고 부를 착복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기술이 발달하면서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고 실업률이 증대되면서, 노동자의 빈곤함은 결국 한계점을 넘.. 2023. 5. 25.
[유럽사] - 산업혁명이 촉발한 사상의 발전, 산업혁명과 경제사상 / 멜서스, 리카도, 푸리에, 마르크스, 루이 블랑, 오웬 [유럽사] - 산업혁명이 촉발한 사상의 발전, 산업혁명과 경제사상 영국에서 처음 촉발된 산업혁명은 곧 유럽전역으로 퍼져나가 유럽인들의 삶을 흔들어 놓았다. 이로인한 필연적인 사회변동은 삶의 변화와 더불어 사상가들의 이념을 바꾸어 놓았다. 산업혁명이 촉발한 사상가들의 이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유럽의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주의에 입각한 자유경쟁과 자유방임을 기본적인 신념으로 삼았다. 이들은 상업활동이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에 맡겨진다면 경제의 발전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전체의 복지와 부가 증가할 것이라는 낙관적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초 맬서스와 리카도는 그러한 의견에서 벗어나 있었다. 멜서스는 ‘인구론'을 제시하며, 자연적 상태에서의 인구는 기하.. 2023. 5. 24.
[유럽사] - 유럽에서의 산업혁명과 근대 유럽의 확립 [유럽사] - 유럽에서의 산업혁명과 근대 유럽의 확립 1851년 런던의 수정궁에서 열린 박람회는 영국이 진행한 산업혁명이 어떤 것인지를 유럽 전역에 알린 사건이었다. 영국이 가진 힘과 공업력을 과시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박람회장에 선보인 각종 기계는 물론이거니와 영국이 가진 석탄, 면직물, 철강의 시장 장악력은 세계에서 앞지를 나라가 없을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영국의 진보는 유럽 국가들에게 자극제가 되었다. 영국과 패권을 다투던 프랑스는 혁명과 전쟁으로 인해 공업의 기계화는 이루지 못한 상태였으며, 독일의 경우는 정치적 분열은 물론 사회경제적 후진성으로 인해 프랑스보다도 늦어진 상태였다. 프랑스는 1830년대 이후, 독일은 1850년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산업혁명을 이뤄낸다. 미국도 1840년대가 되어야.. 2023. 5. 23.
[영국사] - 영국의 발전과 산업혁명, 기계와 교통통신의 발달이 부른 혁명 [영국사] - 영국의 발전과 산업혁명, 기계와 교통통신의 발달이 부른 혁명 산업혁명은 농경과 가축사육을 시작한 신석기혁명 이래 인류의 삶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가장 처음 경험한 곳은 서유럽, 더 좁게는 영국이었다. 그 이유에 대한 대답은 쉬운게 아니지만 제레미 다이아몬드는 지형과 지리가 가져오는 필연석 결과물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18세기의 유럽은 지구 어느 곳보다 부유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비인간적 식민지경영을 통해 이룩한 경제적 윤택함이기도 했다. 무슨 이유로든지 유럽은 어느곳보다 부유했고, 여러 민족국가로 나뉘어 자연적인 경쟁이 아루어졌다는 점, 사회경제적으로 근대적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상공업자와 금융업자가.. 2023. 5. 22.
[프랑스사] - 나폴레옹 체제의 유럽과 대륙봉쇄령, 나폴레옹의 몰락의 시작: 러시아 원정 [프랑스사] - 나폴레옹 체제의 유럽과 대륙봉쇄령, 나폴레옹의 몰락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고 국내외 전쟁을 종결시키면서 맺은 영국과의 아미앙 조약은 영국에게 불리한 조약이었다. 영국은 전비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불리한 조약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영국 내부의 문제가 해결되면서 1803년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교전상태로 돌입했다. 동시에 1805년에는 다시 대불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의 육군에 공격당한 유럽국가들을 포섭했다.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이 3차 대불동맹에 참여했다. 나폴레옹도 육군으로 공격할 수 없는 영국을 희대의 숙적으로 여겼고, 해군이 강한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고 영국의 대불동맹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1805년 10월 프랑스와 에스파냐 연합함대는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 넬슨제독에게 패배를 당.. 2023. 5. 20.
[프랑스사] - 프랑스 혁명의 종료와 나폴레옹의 등장, 제 1제정과 황제 나폴레옹 1세 [프랑스사] - 프랑스 혁명의 종료와 나폴레옹의 등장, 제 1제정과 황제 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의 군인이자 황제이다. 이탈리아계 프랑스인으로 코르시카 섬 출생이다. 그는 브리엔 군사학교를 통해 군인으로 출발한 나폴레옹은 파리의 육군사관학교까지 졸업했고, 1793년 12월 자코뱅 국민공회 당시 반란을 일으킨 툴롱 항 탈환에 공을 세우고, 1795년 10월 데르미도르파를 위해 왕당파 폭동을 진압하면서 젊은 장교로 인정 받았다. 나폴레옹이 군에 재직할 당시 1793년 프랑스에서 루이 16세를 처형한 사건을 계기로 유럽에서는 대프랑스동맹(대불동맹)이 형성되었다. 유럽 각국의 군주들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의 사상이 자국에 퍼지는 것을 경계했다. 영국을 위시한 프로이센, 네덜란드, 에스파냐 등.. 2023. 5. 18.
[프랑스사] - 혁명정부와 로베스피에르, 테르미도르 반동과 나폴레옹의 등장 [프랑스사] - 혁명정부와 로베스피에르, 테르미도르 반동과 나폴레옹의 등장 프랑스 군은 전선에서 패전에 패전을 거듭했다. 네르빈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에 완전히 패배한 프랑스 뒤무리에 장군이 1792년 4월 프랑스 공화국에 반기를 들어 쿠테타를 시도하려다 실패하고 오스트리아 진영으로 도망친 사건이 일어나자, 국민공회의 지롱드파는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여기에 고물가와 식량부족에 허덕이던 파리의 민중이 국민공회를 습격하는 일까지 발생하자, 그해 6월 2일 국민공회는 지롱드파 지도자들을 숙청하였다. 지롱드파의 숙청 이후 주도권을 쥔 산악파는 모든 봉건적 공납을 무상으로 폐지하므로써 농민층의 완고한 지지를 받았다. 여기에 6월 24일 로베스피에르의 주장이 반영된 새로운 93헌법이 채택되었다. 93헌법.. 2023. 5. 16.
[프랑스사] - 국민의회의 개혁과 프랑스를 향한 위협, 루이16세의 처형과 혁명의 혼란 [프랑스사] - 국민의회의 개혁과 프랑스를 향한 위협, 루이16세의 처형과 혁명의 혼란 국민의회는 혁명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프랑스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재정이었다. 혁명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세금이 제대로 징수되지 않고 있었기에, 국민의회는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여 이를 담보로 아시냐라는 지폐를 발행하였다. 성직자와 교회는 재산을 몰수당했고 조직의 개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국민의회는 수도원을 해체하고 성직자를 선출제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직자민사기본법에 대해 로마 교황이 반발하고 성직자의 지지도 얻지 못하면서 이 법은 차후 반혁명과 내란이 일어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또 국민의회가 해결해야할 문제는 제헌, 즉 헌법제정이었다. 헌법에 대한 논의는 혁명 직후인 1789.. 2023. 5. 14.
[프랑스사] - 국민의회의 인권선언과 봉건제 폐지, 루이 16세와 10월 폭동 [프랑스사] - 국민의회의 인권선언과 봉건제 폐지, 루이 16세와 10월 폭동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이후 프랑스 전역은 혁명의 불꽃에 휩싸였다. 지방의 도시들은 파리의 상황을 모방하여 기존의 행정기구를 타파하고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자치위원회와 민병대를 조직했다. 농촌 곳곳에서는 폭동이 발생하여 혼란이 진정되지 않았다. 농민들은 귀족들이 혁명을 저지하려한다는 소문, 외국 군대와 비적이 공격해 올 것이라는 소문을 믿기 시작했고, 이들 사이에서는 공포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농민들은 대공포를 이겨내기 위해서 호미와 갈퀴같은 무기로 쓸만한 자위책을 강구하였다. 이들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여 귀족의 성과 영주의 저택을 습격해 불을 지르고, 봉건적 권리가 쓰인 문서를 불살라버렸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폭동 소식에 파리의.. 2023. 5. 9.
[프랑스사] -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 앙시앵레짐의 붕괴와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프랑스사] -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 앙시앵레짐의 붕괴와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프랑스 대혁명의 깊은 원인은 구체제의 모순인 앙시앵 레짐이다. 그러나 혁명을 촉발시킨 트리거는 프랑스의 경제적 위기였다. 절대왕권을 자랑하던 루이 14세 말년 때부터 프랑스는 위그노 탄압등으로 국내외 산업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며 재정적 어려움에 허덕였으며, 루이 15세를 거쳐 루이 16세에는 결국 귀족의 면세특권을 없애려고까지 하였다. 결국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지만 그만큼 프랑스의 재정상태는 엉망이었다.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참전했던 미국 독립전쟁은 결국 프랑스 국가재정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루이 16세의 재무장관 칼 론느는 근본적 해결책은 앙시앵레짐에 기반한 면세특권임을 간파하고 보조지세의 부과를 위한 개혁을 준비했다. .. 2023.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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