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중국사38

[중국사] - 청의 마지막 선택, 광서신정과 입헌 준비 계획 [중국사] - 청의 마지막 선택, 광서신정과 입헌 준비 계획 서태후는 반외세를 외쳤던 반란인 의화단 운동을 이용하여 열강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강력한 열강의 군대에 의해 의화단이 전멸상태에 빠지자, 어쩔수 없이 다시 개혁을 다시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 열강들이 군대를 이끌고 북경으로 들어와 점령하자, 열강과 강화협상을 추진하면서 개혁을 추진해야했다. 그리하여 서태후는 1901년 1월에 이른바 ‘변법상유'를 발표하여 광서신정을 지시했다.신정은 ‘새로운 정치’라는 뜻으로, 정부 차원에서 전반적으로 서구화와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중국 사회의 본격적 근대화는 이 광서신장에서 찾을 수 있다. 열강에게 위협받는 현실을 탈치하기 위해 청조는 광서신정에서 신식군대의 창설과 훈련을 가장 중시하였다. 그리.. 2024. 10. 4.
[중국사] - 청을 일으키려했던 무술개혁과 새로운 시련, 의화단운동 [중국사] -  청을 일으키려했던 무술개혁과 새로운 시련, 의화단운동 중국이 자강운동을 일으키며 혁신을 꾀할때, 일본 역시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국력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청과 일본은 점차 긴장을 더해가고 있었다. 긴장 속의 중일 관계는 마침내 청일전쟁으로 폭발하였다. 청일전쟁은 사실 청나라 전체의 국력이 투사된 전쟁은 아니었다. 당시 북양대신 이홍장 소속 북양군대와 일본의 총동원령에 의해 모인 군대가 맞붙은 군대였다. 이 전쟁에서 참패를 당한 청조는 일본과의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배상금을 물어내야 했다. 은 2억냥과 조선에서의 영향력, 대만을 일본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당시 청 군대의 패배는 청의 관료와 사대부들은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아시아의 호랑이가 위성국인 일본에게 패하고, 동시에 유럽열강이 중.. 2024. 10. 3.
[중국사] - 새로운 희망, 청의 변법자강운동 [중국사] - 새로운 희망, 청의 변법자강운동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은 두번의 아편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청조에게서 난징조약과 베이징조약을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당시 태평천국운동으로 전국 각지에서벌어지는 반란을 진압하는데 전전긍긍했던 청조는 영토가 아닌 겨우 통상조약만으로 침략을 멈춘다는 서구열강의 조건에 바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침략의 시작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제 청조와 서구는 대립이 아닌 협조관계로 전환되었고, 이를 위해 청에는 총리아문이라는 관청이 설치되어 서양과의 모든 사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대신 열강은 청조에게 군사력 원조와 근대적 기술, 차관같은 자본 협력을 약속했다. 이를 활용해 청조를 지원하고, 청나라 내부에서 열강의 이익을 완고히 하였다. 이 무렵 청의 권력은.. 2024. 10. 2.
[중국사] - 청 몰락의 신호탄, 태평천국의 시작 [중국사] - 청 몰락의 신호탄, 태평천국의 시작 아편전쟁의 패배로 중국은 거액의 배상금을 영국에게 배상해야 했다. 또한 거액의 전쟁비용까지 부담하면서 청조의 재정은 적자로 치달았다. 여기에 남경조약으로 인해 광주에서 상해로 경제의 중심지가 옮겨 가버리자, 광주를 비롯한 남부에서는 경기 침체와 대규모 실업사태가 발생하였다. 사회적 불만이 쌓이고 있었고 거기에 경제적 어려움이 겹치자, 청조에 대한 불만이 분출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1850년 민중의 불만이 터져나와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난다.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나기 10년 전부터 광서성에서는 100회에 이르는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중 태평천국운동만이 유일하게 전국적 규모의 동란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서구에서 유입된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성립된 이념을 .. 2024. 10. 1.
[중국사] - 청 몰락의 시작, 아편전쟁 [중국사] - 청 몰락의 시작, 아편전쟁 19세기 들어와 청왕조와 중국 사회는 안정과 번영의 시기를 지나, 이전과는 다른 쇠퇴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장기적인 평화에 따라 늘어난 인구는 19세기에 세계인구의 1/4를 차지하는 4억 5000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를 지탱해야할 사회 시스템은 이미 낡아버린 청조의 것이었고, 물적 기반 역시도 미약했다. 4억에 이르는 인구를 부양할 자원의 개발이나 생산성 향상, 기술 발전은 인구의 증가 속도보다 느렸고, 이는 사회적 불균형과 위기를 부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민중의 반란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인구의 증가 압력을 버티지 못한 생태계도 붕괴하여, 산사태, 가뭄,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가 빈번히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대응해야만 하는 청조의 능력은 너무.. 2024. 9. 21.
[중국사] - 청대 백련교도의 난, 청의 백련교 진압 [중국사] - 청대 백련교도의 난, 청의 백련교 진압 백련교는 남송 시대에 창설된 백련종에서 기원한다. 기본적으로는 불교로, 미륵신앙이 함께 결합하면서 청 정부에 대한 반체제적인 색채를 띄게 되었다. 여기에 마니교의 평등주의와 금욕주의가 함께 더해지면서 종말론적 메시아 신앙을 가진 백련교가 탄생하였다. 여러 교리가 통합된 백련교는 명대에 민중 반란의 주류를 이루었으나, 청이 대륙을 정복하고 치세를 이루는 동안에는 민간에 숨어들어 세를 넓히고 있었다. 이후 사회가 혼란해지자, 민간에 잠복하고 있던 백련교는 수면위로 올라와 반란을 일으키는 군벌들의 종교적 지지층이 되어주었다. 가경제 치세 연간에 백련교 반란은 섬서성 남부, 사천성 동북부, 호북성 서부의 산악지역, 하남성, 감숙성의 산악지대에서 발생하였다. .. 2024. 9. 21.
[중국사] - 청 건륭제 치세와 대일통사상, 청의 황금기 [중국사] - 청 건륭제 치세와 대일통사상, 청의 황금기 옹정제는 1735년 사망했다. 그리고 그 후계로 옹정제의 아들인 24살의 보친왕 홍력이 건륭제로 즉위했다. 건륭제의 치세 60년은 청조의 최대 전성기이자 대일통을 이룬 시기라고 평가 받는다. 여기서 말하는 대일통은 영토적 통일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화적 이념까지 포함하는 큰 규모의 통일이다. 청은 산해관에서 명과 대치할때부터 대일통의 개념을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홍타이지 시대에 청은 내몽골을 병합하였고, 이를 통해 대일통의 개념을 명분으로 전쟁수행에 필요한 인력과 자원을 공급받기도하였다.  청은 북방뿐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도 군대를 보내어 변방에 대한 수비를 선제적, 공격적으로 펼쳤다. 앞서 말한 내몽골, 외몽골뿐 아니라 서북지역의 신강, 청해를.. 2024. 9. 20.
[중국사] - 청대 옹정제의 개혁과 개토귀류 [중국사] - 청대 옹정제의 개혁과 개토귀류 청은 강희제 연간에 전성기를 누렸다. 강희제는 61년이라는 오랜기간동안 통치하며 안정된 황권을 바탕으로 국가를 경영할 수 있었다. 1722년 강희제가 사망하면서 그의 후임으로 4남인 옹정제가 즉위하였다. 옹정제는 치밀하면서 성실하기까지 한 성격으로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꾸준히 모으며 황제가 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 후 강희제가 붕어하자  황좌를 놓고 대립각을 세우던 8황자, 9황자 10황자, 14황자를 창춘원에 감금시켜버리고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황좌에 오른다. 옹정제의 통치기간은 겨우 13년이나 강희제 연간 말기에 나타나던 사회의 혼란상을 다시 바로잡은 것으로 그 업적을 치하하는 평이 많다. 그리고 뒤이어 나타나는 건륭제의 치세를 준비한 시기라고 평하기.. 2024. 9. 19.
[중국사] - 청의 전성기와 강희제의 시대 [중국사] - 청의 전성기와 강희제의 시대 후금을 청으로 만들고 기틀을 다진 홍타이지가 죽고 그의 아들인 순치제가 산해관을 돌파한다. 순치제는 어린나이에 즉위하여 숙부인 도르곤의 섭정을 받았으나, 멸망한 명의 뒤를 이어서 청의 내실을 공고히하고 통일국가로서 기틀을 마련하였다. 순치제가 산해관을 돌파한 이후 중원으로 들어온 청은 투항한 명의 장군 오삼계, 상가희, 경계무를 왕으로 봉하고 막대한 재정을 지원하였다. 순치제 이후 1661년 청의 4대 황제 강희제가 8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한다. 강희제는 14살의 나이에 친정을 시작하여, 내치와 외정 양 측면에서 눈부신 업적을 쌓았다. 강희제가 있었기에 청은 중국대륙을 온전히 지배할 수 있었다. 강희제는 이들과 함께 남아있는 반청세력을 청소했다. 그러나 반청세력이.. 2024. 9. 18.
[중국사] - 송나라의 중국 통일과 새로운 적, 거란 [중국사] - 송나라의 중국 통일과 새로운 적, 거란 예로부터 내륙 아시아 초원지대에는 수많은 유목민족이 거주하였다. 유목민족들은 말, 양, 염소, 낙타등의 가축을 기르며 중국의 북쪽 초원지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중국은 이러한 유목민들이 세력을 결집하지 못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며 관리하였는데, 중국이 혼란에 휩싸이게되면 유목민이 힘을 모을 기회가 생기곤 했다.10세기 초에 시라무렌 강, 랴호허 강 두개의 강 유역에는 거란이라는 부족이 있었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거란은 여덟부족이 연맹체를 구성하고 있었으나 9세기 후반 점차 통일의 기운이 일어난다. 당시 당은 황소의 난과 환관의 정치로 내부의 혼란에 신경쓰느라 변경에 위치한 거란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다. 거란은 이런 상황을 틈타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다.. 2024. 8. 22.
[중국사] - 송 태조 조광윤과 중국통일 [중국사] - 송 태조 조광윤과 중국통일 송나라를 세운 조광윤은 중국 5대 10국 시대를 마무리 한 후주의 장군이다. 송 태조 조광윤의 출신은 무관 출신이었다. 그의 집안은 무관출신이었는데 아버지 조홍은은 앞선 왕조인  후당, 후진, 후당 등 3조를 섬기며 군관으로 근무한 고위급 지위관이었다. 애초에 당나라의 관료 가문이었던 조광윤의 선조는 증조부 때부터 제위 찬탈을 노리는 군벌 휘하에서 군관으로 공로를 쌓았고 그의 아버지 조홍은은 당시 상당한 고위직인 근위대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길을 따라 20세의 나이에 군에 입대한 조광윤은 후한의 장수였던 추밀사 곽위의 막료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 후한의 대장 곽위의 휘하에 있으면서 공을 세웠다. 후한에 속해 군공을 세우던 도중 후한의 황제 은제 유승우가 .. 2024. 8. 22.
[중국사] - 중국사 최후의 분열, 5대 10국의 시대 [중국사] - 중국사 최후의 분열, 5대 10국의 시대  주전충은 가난한 농부출신으로 황소의 난이 발발하자 그의 무리에 가담하여 장안함락에 공을 세웠다. 그가 두각을 나타내자 황소는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황소는 장안을 함락하고 대제를 세웠으나, 대제는 정치가로서 자질이 부족하여 자멸의 길에 들어섰다.  주전충은 촉에 있던 당나라 장군 왕중영과 내통하여 장안에서 황소를 격퇴하였다. 이 전공으로 주전충에게는 당나라로부터 사례가 내려졌고, 이때 전충이라는 이름도 받았다. 주전충은 절도사로 즉위한 후, 당나라 내부에서 주도권 쟁탈전을 벌였고, 여기서 승리하여 실권을 장악한다. 당시 당나라는 장안 일대만을 보유한 지방정권에 불과했고, 각지에서는 절도사들이 군웅할거하고 있었다. 907년 주전충은 당 소선제로부터 .. 2024. 8. 22.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