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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당 현종과 양귀비, 사그러지는 당나라 [중국사]- 당 현종과 양귀비, 사그러지는 당나라 측천무후로 인해 단절되었던 당 왕조는 중종의 복위로 인하여 다시 복원되었다. 그후 예종이 즉위 하였고 다음으로 예종의 3남인 현종이 6대 황제로 즉위하여 당을 개원의 치세라는 전성기로 이끌었다.  당 태종 시기 300만 미만이던 호구수가 현종치세 726년에는 두배인 706만호로 늘어났다. 경제적 호황기를 맞아 쌀값도 저렴하였고, 태평의 시대로 평가된다. 그러나 국가의 근간이던 균전제와 부병제등 율령체제가 붕괴될 조짐이 보이던 때 역시도 이때이다. 토지 환수가 안되어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지자 균전제가 흔들렸고, 균전제 위에 기초한 부병제도 덩달아 부실해져 갔다. 빈농은 고향을 등지고 토지를 떠나 유랑민이 되어갔다.  당 현종은 황후가 죽은 뒤 자신의 며느리.. 2024. 8. 11.
[중국사]- 고구려 멸망의 주인공, 당 고종과 여황제 측천무후 [중국사]- 고구려 멸망의 주인공, 당 고종과 여황제 측천무후당 고종은 당 태종이 마무리 짓지 못한 고구려 원정과 나당전쟁을 마무리하고 동쪽의 정벌을 마무리한다. 비록 신라는 동쪽에 남아있었지만, 가장 위협적이었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요동의 철광석과 만주의 생산력에 대한 것들을 이미 차지한 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한가지 고종대에 주목할만 것은 중국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여자 황제, 측천무후가 있다. 그녀는 당 태종의 후궁으로 있다가, 태종이 죽자 감업사의 비구니로 출가한다. 당시 법도로는 후사를 두지 못한 선제의 후궁은 비구니가 되어야했다. 그러나 그를 눈여겨 보던 태종의 아들 고종은 그를 다시 불러들여 후궁으로 삼았다. 어머니뻘이던 여자를 다시 자신의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그후 후궁의 자격으로.. 2024. 8. 11.
[중국사]- 당의 건국과 당 태종 이세민 치세, 여당전쟁의 이야기 [중국사]- 당의 건국과 당 태종 이세민 치세, 여당전쟁의 이야기당의 창업자는 고조 이연이지만 수나라 말기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실질적으로 창업을 주도한 인물은 2대 황제 당 태종 이세민이었다. 이는 훗날 조선의 창업자 이성계의 아들들이 실질적으로 조선의 창업에 앞장선 것과 매우 유사하다. 당 고조 이연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세민은 장안성의 북문인 현무문에서 황태자인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을 살해하고, 아버지로부터 사실상 강제적으로 양위를 받았다. 이를 현무문의 변이라고 부른다. 변 사건 이후 2달이 지나 아버지로부터 황위를 이어받아 29세에 황제가 된 23년간의 태종의 정치는 후세에 ‘정관의 치’라 불리며 높게 평가되었다.  이런 정관의 치세를 연 태종의 정치에는 세가지 조처가 있었다. 태종은 오경정의를 .. 2024. 8. 10.
[한국사] - 고구려 당나라 전쟁과 안시성 / 고당전쟁 / 수당전쟁 [한국사] - 고구려 당나라 전쟁과 안시성 / 고당전쟁 / 수당전쟁 고구려 정벌에 나라의 국운을 걸었던 수나라가 멸망하고 그 뒤를 이어서 당나라가 중원의 패자 등장했다. 당은 고조 이연이 618년 건국하였고, 그 이후 잠시동안 혼란해진 정국을 다스리고 내치에 신경을 쓰느라 동아시아에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고구려 역시 수와의 전쟁으로 소모한 막대한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당과의 친선관계에 돌입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다가 망한 걸 직접 목도한 당 역시 고구려를 무조건 적대시 한다는 것은 망국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 태종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당 내부에서 일어난 군사적인 움직임을 모두 평정한 당태종은 북에서 호시탐탐 중국을 노리는 동돌궐까지 복속시켰다. 또한 서.. 2022. 12. 14.
[중앙아시아사] - 거란의 등장과 번영, 키타이제국 당나라의 명운이 쇠해져 가던 10세기 초 시라무렌 강과 랴호허 강 유역에서 살던 유목부족인 거란이 새로이 국가를 건설하였다. 동호와 선비 계열에서 갈라져 나와 4세기 경 자신들만의 세력을 구축했으며 내몽골 지역을 영유하였다. 10세기 초 당시 당은 정권말이여서 내부의 혼란에 몰두하여 국경 외곽 변경에 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고, 거란은 그러한 상황에서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다. 907년 당이 멸망함과 동시에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거란을 건국했다. 이들은 농경도 병행하여 반농반목적 생활을 영유하였고, 여진-만주족과는 별개로 더 유목민의 성격이 짙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란이라는 이름보다는 키탄 또는 키타이에 가까운 발음이었던 이 제국은 야율아보기라는 인물에 의해서 세워졌다. 야율은 부족의 명칭 또는 씨족 성으로.. 2022. 5. 12.
[중앙아시아사] - 위구르 제국의 후예: 하서 위구르 [중앙아시아사] - 위구르 제국의 후예: 하서 위구르 위구르가 840년 키르기즈에 의해 멸망하면서 위구르의 유랑민 집단은 크게 두가지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남쪽으로 이동한 남주파와 서쪽으로 이동한 서주파로 나뉘어진다. 남쪽으로 향했던 남주파는 외게테긴을 다시 카간으로 세우고 험한 고비사막 이남으로 향하였다. 남주파는 고비사막 이남에서 다른 위구르 세력을 규합했다. 당시 남주파의 세력은 어림잡아 인구 100만명에 해당했다. 위구르인들은 하나의 세력을 이루어 당에 식량을 우선 요구했고 수많은 위그드인이 몰려오자 당은 이들의 항복을 요구하며 대치하였다. 당으로서는 칸까지 포함된 정치집단의 등장이 반갑지 않았으니, 당연한 조치였다. 그러나 곧 당은 843년 이들의 본진을 공격하여 위그드인들을 몰살시켰다. 이러한.. 2022. 5. 8.
[중앙아시아사] - 위구르 제국의 등장과 당나라, 돌궐의 멸망과 안록산의 난 [중앙아시아사] - 위구르 제국의 등장과 당나라, 돌궐의 멸망과 안록산의 난 위구르 제국은 투르크계 유목민인 칙륵의 후예이다. 칙륵 또는 철륵으로 불리는데 이는 수레를 뜻한다. 이들은 바퀴가 높은 수레를 이용하여 유목을 했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605년 서돌궐의 지배 하에 있던 칙륵이 세력이 커지자 서돌궐의 카간은 칙륵의 수령들을 급습하여 죽여 세력을 억제했다. 그러자 칙륵에 속하던 부구, 통라, 위구르, 바이쿠르등이 모두 스스로를 위구르라고 칭했다. 이들은 셀렝게 강 부근에 살았으며 인구 10만에 병사의 숫자가 5만을 헤아렸다. 이 기록에 따르면 7세기 초에는 톈산 방면에 살던 투르크계 유목민 집단이 서돌궐의 공격으로 동북방 셀렝게 유역으로 이주하면서 위구르를 중심으로 세력화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2022. 5. 2.
[중앙아시아사] - 이슬람과 당의 격돌, 탈라스 전투 [중앙아시아사] 이슬람과 당의 격돌, 탈라스 전투 무하마드가 박해를 피해서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헤지라(622년) 이후 세력을 키우던 이슬람 세력은 중앙아시아로 진출을 꾀했다. 정통 칼리프시대가 4대 시아알리를 마지막으로 661년에 마감되고 술탄을 위시한 우마이야 왕조가 건립되며 이슬람의 동방 진출은 시작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옮기고 동쪽진출을 시작했다. 중앙아시아의 상업적 성격이 짙은 도시국가들을 공격하여 공물을 통한 물자 획득에 열정적이었다. 그리고 697년 하자즈 이븐 유스프가 바스라 총독에 임명되면서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이들은 동쪽으로의 정복전쟁을 통해서 이슬람 내부에 쌓여있는 종족적 갈등을 외부로 돌려 발출해내고자 했다. 이슬람 세력은 먼저 부하라 인근 도시 바이칸드.. 2022. 4. 29.
[중앙아시아사] - 당과 돌궐제국, 돌궐의 서방정책 새롭게 몽골초원에서 흥기한 돌궐은 제국을 세웠다. 흉노와 달리 돌궐은 영역이 넓어 서쪽 카스피해까지 미쳤기 때문에 당시 서아시아에 존재하던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물론이고 그 너머 비잔티움 제국과도 관계를 맺었다. 돌궐제국은 사산왕조와 연합해헤프탈 훈족을 멸망시키고 아무다리야강을 기점으로 서로의 영토를 분할 하였다. 이로써 돌궐제국은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돌궐은 초원길을 통한 비단무역을 두고 대립하였다. 돌궐제국은 사산왕조가 영유하고 있던 국제 교역로를 우회해서 이들이 가지고 있던 영향력을 빼앗고자 했다. 그리하여 교역로를 두고 돌궐은 페르시아를 거치지 않고 비단을 교역할 길을 찾기위해 노력하였다. 이때 돌궐의 눈에 들어온 나라가 바로 동로마제국, 비잔티움이었다. .. 2022.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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