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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 청을 일으키려했던 무술개혁과 새로운 시련, 의화단운동 [중국사] -  청을 일으키려했던 무술개혁과 새로운 시련, 의화단운동 중국이 자강운동을 일으키며 혁신을 꾀할때, 일본 역시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국력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청과 일본은 점차 긴장을 더해가고 있었다. 긴장 속의 중일 관계는 마침내 청일전쟁으로 폭발하였다. 청일전쟁은 사실 청나라 전체의 국력이 투사된 전쟁은 아니었다. 당시 북양대신 이홍장 소속 북양군대와 일본의 총동원령에 의해 모인 군대가 맞붙은 군대였다. 이 전쟁에서 참패를 당한 청조는 일본과의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배상금을 물어내야 했다. 은 2억냥과 조선에서의 영향력, 대만을 일본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당시 청 군대의 패배는 청의 관료와 사대부들은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아시아의 호랑이가 위성국인 일본에게 패하고, 동시에 유럽열강이 중.. 2024. 10. 3.
[중국사] - 새로운 희망, 청의 변법자강운동 [중국사] - 새로운 희망, 청의 변법자강운동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은 두번의 아편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청조에게서 난징조약과 베이징조약을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당시 태평천국운동으로 전국 각지에서벌어지는 반란을 진압하는데 전전긍긍했던 청조는 영토가 아닌 겨우 통상조약만으로 침략을 멈춘다는 서구열강의 조건에 바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침략의 시작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제 청조와 서구는 대립이 아닌 협조관계로 전환되었고, 이를 위해 청에는 총리아문이라는 관청이 설치되어 서양과의 모든 사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대신 열강은 청조에게 군사력 원조와 근대적 기술, 차관같은 자본 협력을 약속했다. 이를 활용해 청조를 지원하고, 청나라 내부에서 열강의 이익을 완고히 하였다. 이 무렵 청의 권력은.. 2024. 10. 2.
[중국사] - 청대 옹정제의 개혁과 개토귀류 [중국사] - 청대 옹정제의 개혁과 개토귀류 청은 강희제 연간에 전성기를 누렸다. 강희제는 61년이라는 오랜기간동안 통치하며 안정된 황권을 바탕으로 국가를 경영할 수 있었다. 1722년 강희제가 사망하면서 그의 후임으로 4남인 옹정제가 즉위하였다. 옹정제는 치밀하면서 성실하기까지 한 성격으로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꾸준히 모으며 황제가 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 후 강희제가 붕어하자  황좌를 놓고 대립각을 세우던 8황자, 9황자 10황자, 14황자를 창춘원에 감금시켜버리고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황좌에 오른다. 옹정제의 통치기간은 겨우 13년이나 강희제 연간 말기에 나타나던 사회의 혼란상을 다시 바로잡은 것으로 그 업적을 치하하는 평이 많다. 그리고 뒤이어 나타나는 건륭제의 치세를 준비한 시기라고 평하기.. 2024. 9. 19.
[중국사] - 후금, 만주족의 등장과 청나라의 중원 정복 [중국사] - 후금, 만주족의 등장과 청나라의 중원 정복 명이 사회적 혼란에 휩싸여 주변 민족에 대해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자 만주에서 새롭게 세력이 흥기하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만주족이라 부르며 활동하였다. 만주족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은 누르하치였다. 그는 건주여진에 속한 건주좌위에 속했고, 여진족의 지배층 출신이었다. 당시 명의 요동 대장 이성량 휘하에서 세력을 키워왔다. 그러나 여러가지 가설과 추측이 있지만, 명이 누르하치의 조부와 부친을 살해한 것을 구실로 누르하치는 명 세력과의 갈라선다. 그 후 누르하치는 군사를 일으켜서 3개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던 여진을 통일했다. 만주에 흩어져서 살던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을 규합한 누르하치는 세력을 결집시키고, 여진을 만주족이라는 새로운 민족으로 통합.. 2024. 8. 19.
[조선사] - 강화도 조약과 개항, 불평등조약의 시작 [조선사] - 강화도 조약과 개항, 불평등조약의 시작 1873년 서양과 통상을 반대하면서 척화비까지 세우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조선의 정권은 고종이 손에 쥐게 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완전하게 왕권을 바로 세우지 못했고 왕비의 인척인 민씨 일가가 정국을 주도하는 형식이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을 부정하고 권력을 잡은 민씨세력은 척화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결국은 외국에 통상요구에 조선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에 관심을 돌렸다. 척화에 목숨걸던 대원군 정권이 무너지자 조선보다 훨씬 앞서서 개항한 일본은 조선을 자신들이 당했던 방식 그대로 개항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조선에 자국 군함 운요호를 파견하였다. 일본에서 출발한 운요호는 부산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동해안의 해로를 측량하고 강화도 초지진에서 함포사.. 2023.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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