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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조선사11

[조선사] - 조선 내부의 갈등과 개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조선사] - 조선 내부의 갈등과 개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조일수호조약 체결 이후 조선정부는 근대적인 서양문물을 도입하기 위해서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외교와 통상, 군사업무를 추진하는 개화 추진기구를 설치하고 별기군이라는 신식군대를 설치하여 서양의 앞선 무기와 군사기술을 배우려 했다. 또한 청과 일본의 근대적 문물을 보고 배우기 위하여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강화도 조약 직후 수신사를 보내고, 그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개화파를 위시하여 조사 시찰단을 편성해 일본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4개월에 이르는 시간동안 일본의 산업과 사회를 살펴보고 귀국하였다. 조선의 개화정책은 흥선대원군이 주장하던 기존의 척화에서 돌아선 것으로 최초의 개화정책이라는 점은 높이 평가 할 만 하다. 그러나 조선의 개화는 봉건적.. 2023. 2. 11.
[조선사] - 조선 후기 사회와 동학농민운동, 동학과 전봉준 [조선사] - 조선 후기 사회와 동학농민운동, 동학과 전봉준 조선 후기에 들어서자 국가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세제도는 극도로 문란해졌다. 세금을 걷는게 아닌 수탈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삼정의 문란, 황구징수 등이 남발되었고, 어지러운 조세제도는 대원군 집권 이후, 개항을 한 이후에도 바로잡히지 않았다. 부패한 관리와 아전들의 수탈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편 조선이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개항을 시작한 이후, 조선 사회 곳곳으로 들어와 활동하던 청과 일본의 상인들은 농민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한 원인이었다. 조청수륙무역장정 이후 청 상인들은 내륙을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었고, 청에서 생산된 물건을 조선에 들여왔다. 조선에서 이와 관련된 산업을 하던 수공업자들은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2023. 2. 10.
[조선사] - 강화도 조약과 개항, 불평등조약의 시작 [조선사] - 강화도 조약과 개항, 불평등조약의 시작 1873년 서양과 통상을 반대하면서 척화비까지 세우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조선의 정권은 고종이 손에 쥐게 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완전하게 왕권을 바로 세우지 못했고 왕비의 인척인 민씨 일가가 정국을 주도하는 형식이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을 부정하고 권력을 잡은 민씨세력은 척화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결국은 외국에 통상요구에 조선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에 관심을 돌렸다. 척화에 목숨걸던 대원군 정권이 무너지자 조선보다 훨씬 앞서서 개항한 일본은 조선을 자신들이 당했던 방식 그대로 개항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조선에 자국 군함 운요호를 파견하였다. 일본에서 출발한 운요호는 부산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동해안의 해로를 측량하고 강화도 초지진에서 함포사.. 2023. 2. 9.
[조선사] -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와 이양선 출몰, 조선의 개항 서세동점의 시기인 19세기, 조선은 위기를 맞고 있었다. 조선은 내부적으로는 세도 정치의 폐단으로 조세제도가 흔들리며 삼정의 문란이 일어나고, 무능한 지배세력으로 대표되는 양반에 대항하여 농민의 봉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때 이미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패배하고 개항된 상태였으며, 아시아의 무력적 정도를 알게 된 서구 열강 세력이 동쪽으로 눈을 돌려 조선에 접근해오기 시작했다. 이때 집권하기 시작한 흥선대원군은 격변기를 헤쳐나가야 할 정치적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조대비와 일부 척족 세력의 지지를 기반으로 고종의 즉위와 함께 수렴청정을 통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뒤 고종을 위해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만의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흥선대원군.. 2023. 2. 8.
[조선사] - 조선의 성리학 이념과 붕당 정치의 시작 [조선사] - 조선의 성리학 이념과 붕당 정치의 시작 조선은 신진사대부들의 백성을 위한다는 위민 정치라는 성리학 이념 아래 건국되었다. 하지만 조선 초기 정치는 사뭇 달랐다. 조선초의 정치는 실용적인 것을 중시하는 훈구파 공훈세력이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사림세력은 조선의 건국에 회의적이었던 고려의 온건개혁파들이 고향으로 내려가 은둔하면서 지낸 세력이다. 훈구 공신 세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특권 세력화 되었고, 조선 성종은 이들을 견제하고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건립하고자 사림 세력을 등용하였다. 고려의 온건개혁파의 후예인 사림은 향촌의 중소 지주라는 경제적 기반과 상대적으로 우월한 도덕성을 기반으로 훈구파를 비롯한 기존 기득권 세력을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갈등으로 인하여 사림들이 대거 정계에서 숙청당하는 사건.. 2023. 2. 7.
[조선사] - 세도정치의 등장과 흥선대원군의 개혁 [조선사] - 세도정치의 등장과 흥선대원군의 개혁 조선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세워졌다. 성리학에서 말하는 세도정치(世道)란 학식과 덕망이 있는 사람이 세상의 올바른 도를 책임지는 정치를 말한다. 그러나 사회의 모순이 반복해 쌓인 19세기 조선의 상황에서는 뜻이 달리 쓰인다. 정조의 둘째인 이공이 11세의 어린나이로 23대 군주로 즉위하는 1800년부터, 헌종 ~ 철종대까지 약 60년에 걸쳐 시행된 세도정치는 부정하게 세력을 휘둘렀다는 의미에서 기세 勢를 사용하여 세도정치(勢道)라고 부른다. 정조가 갑작스레 승하하면서 순조는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했고, 이는 외척과 세도 가문이 정계를 장악하는 시발점이 된다. 이 시기의 세도 정치는 안동김씨와 풍양 조씨 등 노론 출신의 외척 가문들 정치를 주도하고 여기.. 2023. 2. 6.
[조선사]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만주족의 흥기와 조선의 시련 [조선사]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만주족의 흥기와 조선의 시련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조선과 명이 전쟁에 국력을 쏟아 붓는 사이 만주에 위치한 여진족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본디 만주지역은 명의 관리하에 있었는데 명은 산해관 너머 여진에 대한 통제를 풀 수 밖에 없었고, 조선 역시도 전쟁으로 인한 여파로 내부수습이 급해 여진족에 신경쓸 수 없었다. 건주여진의 추장인 누르하치가 여진 세력을 통일하고 금나라를 이어받는다는 뜻에서 후금을 건국했다. 후금은 1115년에 있었던 완안부 아골타의 금나라의 후계를 잇는 다는 명분으로 붙인 국호였다. 명은 후금이 건국되자 즉시 견제를 시작하였다. 만주로 병력을 출병시켰고 여진족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인 조선에게도 출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선의 임금 광해군은 상황.. 2023. 2. 5.
[조선사]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조선의 의병들 [조선사]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조선의 의병들 조선이 건국되고 약 200년동안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평화로웠다. 조선 건국 초기에 명과 북원이 대치하던 상황은 명이 중원을 차지하면서 명의 승리로 끝났다. 15세기에 비교적 평화롭게 교류하던 조선과 일본은 16세기에 들어 갈등이 심화되었다. 일본은 조선에 더 많은 무역을 요구하였고, 조선은 이를 거절하고 무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던 것이다. 이에 일본인들은 무역을 요구하며 삼포왜란, 을묘 왜변과 같은 변란을 일으켰다. 일본의 요구에 조선은 비변사를 설치하며 일본의 정세를 살폈다. 동시에 국방을 강화하자는 10만 양병설 등이 주장되었으나 이는 붕당간의 견해차이와 예산 등의 문제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한편 일본에서는 전국시대가 종료되었다. 100년간의 전국시.. 2023. 2. 4.
[조선사] - 세종대의 영토 개척, 4군 6진과 쓰시마 정벌 조선 건국 초기 동아시아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명은 원을 중원에서 몰아냈지만, 여전히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고, 북원은 몽골 초원에서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조선은 건국과 동시에 피폐해진 군사력을 재건하여 수많은 침략으로 무너진 방어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다행히 원과 명의 갈등으로 조선 북쪽의 땅에 대해서는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기에 조선은 이 땅의 여진족을 회유 또는 공격하였다. 조선은 북쪽으로는 4군과 6진을 개척하였다. 국경선이 강을 기준으로 할때 외적의 침입을 가장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기에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의 경계로 삼고자 북진해 요새이자 근거지를 조성한 것이다. 조선 태조인 이성계는 동북면 출신으로 고려말부터 동북면의 여진족을 평정하여 두만강 하류지역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2023. 2. 3.
[조선사] - 조선 건국과 1, 2차 왕자의 난, 태종 이방원의 즉위 [조선사] - 조선 건국과 1, 2차 왕자의 난, 태종 이방원의 즉위 이성계는 우왕이 지시한 요동 정벌을 수행하기 위해 출정하다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을 향해 진격했다. 이성계가 개경을 점령하고 군권과 정권을 장악한 뒤 권문세족의 경제기반인 토지를 박탈하기 위해 과전법을 실시하였다. 급진적 토지개혁으로 인해서 고려 왕조의 기득권 세력은 경제기반을 잃고 실각했고, 그 과정에서 혁명에 반대하던 정몽주와 온건 개혁파도 숙청되었다.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선양 받았다. 이성계는 즉위 사실을 명에 알리고 제도를 공표했다. 명으로부터 화신과 조선 중 어떤 것을 국호로 할지 물은 뒤 국호를 조선으로 하여 태조 2년에 반포하였다. 3년에는 한양을 새로운 .. 2023. 2. 2.
[조선사] - 광해군의 즉위와 인조반정, 폐모살제의 뜻 [조선사] - 광해군의 즉위와 인조반정, 폐모살제의 뜻 광해군은 1575년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의 사이에서 둘째 서자로 탄생하였다. 선비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슬하에 자녀가 없었고, 장남이자 동복형인 임해군이 있었지만 그는 포악한 성정으로 인해서 왕이 될 재목이 되지 못했다. 또한 인빈 김씨의 소생인 의안군, 신성군 모두 일찍 요절하여 광해군의 왕위 계승서열을 능가하는 사람은 없었다.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이 있었으나 그는 나이가 어렸고, 당시 임진왜란이라는 특수상황에서 분조 활동까지 거치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광해의 왕위계승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선조는 파천과 동시에 평양에서 광해를 세자에 책봉하였다. 그리고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하다가 영변에서 갈라졌다. 광해는 평안도, 강원도.. 2022.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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