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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6

[중앙아시아사] - 중앙아시아의 새로운 패자, 유연 선비족의 뒤를 이어 고비사막 북쪽의 초원을 다스렸던 민족은 유연족이다. 유연은 기원후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초원에 국가를 건국하여 활동하였다. 3세기 전반에 선비족 연합체가 붕괴되고 우문부, 탁발부 같은 일부 선비 부족이 북중국으로 이주하였다. 비어버린 초원을 '칙륵'이라는 투르크 계통의 유목민족이 이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웠다. 유연이라는 국명은 4세기 전반 거록회라는 인물이 몽골 초원에 잔류하던 선비계 유목민들을 규합하면서 사용되었다. 이들은 여여나 예예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유연의 남쪽에 국경을 맞댄 북위는 비하의 의미로 연연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당시 화북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북위의 도무제는 4세기말 유연에 대하여 군사적 원정을 감행하여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군사적 압박속.. 2022. 4. 8.
[중앙아시아사] - 동호의 후예, 유목민족 선비족 [중앙아시아사] - 동호의 후예, 유목민족 선비족 본디 선비는 동호에 속한 부족이었다. 그러나 흉노족 묵특선우에게 공격을 받고 동호는 두 갈래로 나뉘어 이주하였는데 이 두갈래가 오환과 선비로 나누어졌다. 눈강 상류의 산악지역으로 들어간 동호는 선비족이 되어 역사에 기록되었다. 발음의 음가값이 [세르비 : Servi]에 가까웠기에 기록에 선비로 옮겨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1세기 중반 선비는 오환이 한나라의 영향권 아래의 지역으로 이주하자 오환 거주하던 초원지대를 자신들이 채우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동으로는 내몽골에서부터 서로는 주천과 동황에 이르기는 넓은 영역을 관할하였다. 이는 곧 선비족이 중국 북변에 넓게 분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비족은 기본적으로는 후한의 울타리로서 오환 편에 서서 북흉노의 공격.. 2022. 4. 6.
[중앙아시아사] - 북흉노의 서천, 그리고 제국의 멸망 [중앙아시아사] - 북흉노의 서천, 그리고 제국의 멸망 48년 흉노의 분열로 인해서 남흉노 선우 일축왕 비가 한에 투항였다. 신하를 칭하면서 스스로를 호한야 선우로 칭하자 흉노는 북흉노와 남흉노로 갈라지게 된다. 후한의 영내에서 북흉노와 대립하던 호한야 선우는 고비사막 북쪽에 있는 북흉노 포노선우와 대립하게 되었다. 남흉노는 후한의 물질적 지원에 힘입어 북흉노를 정복하고 고비사막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남흉노와 후한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북흉노의 세력이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북흉노는 한과 계속 대립했으며 타림분지의 여러 도시들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여 각 도시들을 흉노의 세력권 아래에 두었다. 특히 도시 쿠차를 앞세워 야르칸드를 정벌하고 서부의 타림분지 세력권내 15개 도시국가에서 추가병력 3만을 .. 2021. 5. 8.
[중앙아시아사] - 중앙아시아와 한나라, 타림분지의 국가들 [중앙아시아사] - 중앙아시아와 한나라, 타림분지의 국가들 중앙아시아의 서부인 서-투르키스탄 지방은 일찍부터 서쪽의 지중해 문명과 접촉했고, 기원전 6세기 경에는 문헌에 등장하며 역사에 등장한다. 그에 비해서 동쪽 투르키스탄의 여러 도시들은 비교적 문헌에 나타나는 기록이 늦다. 비교적 정확하고 자세한 문헌은 동쪽의 흉노가 발흥하여 묵특 선우 이후에 흉노가 몽골 초원과 서역을 장악하자 한나라가 이에 대응하여 외교, 군사적 작전을 펼칠 시기였다. 기원전 176년에 흉노의 묵특 선우는 한나라에 보내는 서신에서 누란, 오손, 오걸 및 그 주변 26개국을 모두 흉노의 속국으로 삼았다고 보냈다. 이를 통해 유추해 볼 때 당시 흉노가 타림분지 주변의 크고 작은 오아시스 도시들을 모두 속국으로 삼았고, 한나라를 둘러 .. 2021. 5. 4.
[중앙아시아사] - 흉노 제국의 대 한나라 전쟁 [중앙아시아사] - 흉노 제국의 대 한나라 전쟁 흉노와 한나라 무제가 참여한 흉노-한 전쟁은 중국 측의 일방적인 기록만이 남아 전하고 있다. 유목민족의 특성상 이러한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흉노는 전형적인 유목국가로 글로 역사를 남기는 일에 매우 미숙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로지 중국측의 기록에만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중국 사서를 기준으로 역사를 살펴볼 수 밖에 없는데, 이를 인식하지 않고 사료 그대로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한 고조 유방이 흉노 때문에 고생을 한 이후 한 무제는 흉노에 대하여 칼을 갈고있었다. 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무제는 기원전 139년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한다. 이는 흉노의 후방을 공격할 세력을 찾는 이유이기도 했다.. 2021. 4. 14.
[중앙아시아사] - 흉노의 등장과 만리장성 [중앙아시아사] - 흉노의 등장과 만리장성 은주 이래로 춘추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북방에 살던 여러 민족들은 주로 정주생활을 하며 보병을 기반으로한 전투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로 넘어갈 무렵 계절적 이동을 하며 기마전을 수행하는 새로운 민족이 등장했다. 중원 사람들은 이들을 가르켜 호(胡)라고 불렀다. 이 호라는 명칭은 특별한 부족이나 국가를 가르키는게 아닌 유목적 생활양식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넓은 범위를 가진 단어였다. 따라서 동호, 임호,누번, 흉노 등은 모두 호에 속하는 집단이었다. 최초의 유목국가였던 스키타이가 역사에 등장한지 3세기 정도가 지난 뒤 유라시아 동쪽에서도 최초의 유목세력이 국가를 이룬다. 역사서에 나타나는 처음 기록은 유명한 사가 사마천의 에서.. 2021.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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