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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근-현대사

[근대사] - 일제의 문화통치와 1920년대 국내 민족운동, 계몽운동의 전개

by Timemapcatographer 2023.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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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 일제의 문화통치와 1920년대 국내 민족운동, 계몽운동의 전개

3.1운동 (좌) / 2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우)

1919년 고종의 인산일에 일어난 3.1운동으로 인해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폭력적인 무단통치로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지속적으로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2대 총독인 하세가와는 3.1운동을 폭력적으로 억압했다가 결국 3년만에 교체되었고, 3대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가 취임하였다. 이들은 효율적인 식민지 경영을 위하여 무조건 억압하는 것이 능사라는 것이 아님을 알고 조선인들의 권리를 일부 인정하면서 민족적 활동도 일부 인정하였다. 이른바 ‘문화통치'의 시작이다.

 

이에 따라서 국내에서는 청년회와 교육 진흥 운동이 점차 일어나기 시작했다. 3.1운동 이후 전국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청년운동은 풍속 개량과 생활 개선 등의 운동으로 이어졌다. 일제의 문화 정책의 변경으로 민족 교육에 대한 관심도 크게 증가하여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 설립운동이 전개되었다. 

 

국내에서 3.1운동을 지도했던 지도부는 당시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 독립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으나 일본은 1차세계대전 승전국에 속했으므로 자연스럽게 승전국의 식민지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민족 운동가들은 민족의 실력 성장 없이는 독립이 이루어 질 수 없다고 판단하고 민족의 실력을 기르는데 힘을 쏟으면서 장기적으로 독립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일어난 경제와 교육에 대한 관심은 물산장려운동과 민립 대학 설립으로 이어져 민족운동의 움직임을 알렸다.

물산장려운동 광고

물산장려운동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토산품을 애용하여 민족의 자본을 육성하자는 취지로 대구에서 처름 시작되었다. 1922년 말 본격화 된 물산장려운동은 한때 국산품 소비를 촉진시키는 등 어느정도 성과를 보였으나 민족 기업 육성이라는 성과는 남기지 못한 채 종료되었다. 일본에서 들여오는 물품들은 자본화, 기업화 되어 대규모의 물량을 싸게 납품하는데 반해 한국의 공산품은 그 정도가 열악하였다. 결국 공산품의 가격에 대한 부담을 소비자에게 부담시키는 구조의 운동이었기에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못했다.

민립대학설립운동과 1924년 청량리에 설립된 경성제국대학 예과

민립대학운동은 국내에서 한인의 손으로 대학을 세워 신지식을 습득하고 신문화를 건설하자는 취지에서 추진되었다. 대학설립을 위한 자금은 1923년 초에 민립대학 기성회가 만들어져 모금을 하는 것으로 충당하려 하였다. 그러나 모금액수가 대학을 세우는데 매우 부족하였고, 24년의 남부지방의 가뭄과 25년의 수해 등으로 인해 지속적인 모금운동도 어려운 처지였다. 결국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중단되게 된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한국인의 움직임은 민족대학의 설립이라는 결실을 이룰 것을 예상하고 1924년 청량리에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설립하면서 이러한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취지를 짓밟았다. 결국 민족의 대학이 아닌 제국의 대학이 한국 최초의 대학이 되었다.

농촌계몽운동, 브나르도 운동의 기사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큰 소득없이 종료되면서 실력양성운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계몽과 문맹 퇴치를 위한 교육 운동은 활발히 전개되었다. 1920년대에는 일하는 청년을 밤에 공부시키는 야학이 활기를 띄었고, 1930년대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에서 문자보급과 농촌 계몽운동을 벌여 커다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를 브나로드 운동이라고 한다. 1920년대와 30년대를 거치면서 대중은 깨어나고 있었고 교육은 점차 퍼져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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