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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중국사]- 세계 제국의 붕괴, 당나라의 멸망과 황소의 난

by Timemapcatographer 2024.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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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세계 제국의 붕괴, 당나라의 멸망과 황소의 난

안녹산

안녹산의 난 이후 당나라의 국정은 혼란스러워졌다. 당 중앙정부와 번진의 갈등, 조정 내부에서의 환관세력, 권력을 향한 암투의 심화와 이에 따른 민생의 어려움이 모두 겹쳐진 결과였다. 변경에서 당을 에워싸듯 설치되었던 번진은 내지로 옮겨졌다. 본디 번진의 역할인 변경의 방어가 아닌 수도 근거리에서 반란 진압을 하기 위해서였다. 50개의 번진 가운데 40개의 번진이 내지로 옮겨졌다. 내지의 번진 가운데 일부는 징세, 사법, 군사등을 독자적으로 행사하는 소왕국적 면모를 가진 번진도 있었다. 특히 천웅, 성덕, 노룡 등의 하북 삼진은 노골적으로 당 중앙정부에 저항했다. 번진을 당 중앙정부에 순응하게 만드는 작업 즉, 번진간섭은 당 왕조에게는 사활이 걸린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 황제와 중앙정부는 중앙 금군을 증강하는게 급선무 였고, 이를 위해서 가혹한 징세 외에는 답이 없었다. 

 

안사의 난 이후부터 당 정부는 바닥난 재정 상태를 호전시키기위해 소금의 전매제를 실시했다. 이전까지 상인에 의해서 자유롭게 판매되던 소금을 정부가 독점하기 시작한 것은 758년 강회 지역이였다. 이것이 큰 성과를 거두어 소금의 전매는 전국으로 확대되어 시행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소금을 통한 세수확보에는  성공하였다. 문제는 너무 성공적이여서 재정수입의 절반이 소금전매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생존에 필수적인 소금이 전매가 되면서 가격이 치솟아올랐다. 소농민은 정상적으로 소금을 살수 없어 소금 밀매업자는 필수 불가결한 존재가 되었다. 또한 차 역시 전매의 대상이 되었고, 차도 소금과 동일하게 밀매업자가 성행하였다. 

 

삶이 어려워지자 민초들은 누군가 반란의 깃발을 들기만 하면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 가장 먼저 반란이 터져나온 곳은 번진의 병사들이다. 이들은 대우에 민감한 존재들이었으므로 절도사와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 당시 일어난 강전태, 방훈의 반란은 번진의 병사들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반란이 길어지면서 번진의 병사들 뿐 아니라 근처의 농민들 역시 반란군에 참여하였다. 이러면서 이들이 주장하는 사항도 단순한 처우 개선이 아닌 평등의 이념을 주창하기 시작했다. 

 

당에 유학했던 신라인 최치원의 ‘토황소격문’으로 유명한 황소의 난은 중국 역사상 태평천국운동과 함께 중국에서 일어난 가장 큰 반란이었다. 황소의 난의 주축은 물론 소금과 차의 밀매업자였다. 황소는 당 왕조의 수도인 낙양과 장안을 향해 진군하며, 자신을 천보평균대장군이라고 자칭했다. 빈부의 격차가 없는 평균을 행하는 장군이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지지층의 주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은 번진의 자립화 움직임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켰고, 황소의 난이 휩쓸었던 화북, 화중, 화남이 피해가 극심했다. 당나라는 황소의 난을 가까스로 진압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지방 군벌들의 성장을 억제하지 못했다.  또한 희종이 반란을 피해 파천했던 사천도 반란의 화를 피하지 못했다.  당 중앙정부는 장안 일대만을 지배하는 일개 지방정권으로 전락했고 결국 주전충 군벌에 의해서 멸망하게 된다. 

 

이렇게 제국을 칭하던 당나라는 20대 황제 애제를 끝으로 300년의 역사를 마무리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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