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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중국사] - 청의 전성기와 강희제의 시대

by Timemapcatographer 2024.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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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 청의 전성기와 강희제의 시대

 

후금을 청으로 만들고 기틀을 다진 홍타이지가 죽고 그의 아들인 순치제가 산해관을 돌파한다. 순치제는 어린나이에 즉위하여 숙부인 도르곤의 섭정을 받았으나, 멸망한 명의 뒤를 이어서 청의 내실을 공고히하고 통일국가로서 기틀을 마련하였다. 

순치제가 산해관을 돌파한 이후 중원으로 들어온 청은 투항한 명의 장군 오삼계, 상가희, 경계무를 왕으로 봉하고 막대한 재정을 지원하였다. 순치제 이후 1661년 청의 4대 황제 강희제가 8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한다. 강희제는 14살의 나이에 친정을 시작하여, 내치와 외정 양 측면에서 눈부신 업적을 쌓았다. 강희제가 있었기에 청은 중국대륙을 온전히 지배할 수 있었다. 강희제는 이들과 함께 남아있는 반청세력을 청소했다. 그러나 반청세력이 이들 삼번왕에 의해 모두 소탕되자, 청조는 삼번의 왕들을 대륙지배에 방해되는 걸림돌로 보기 시작하였다. 토사구팽이라는 단어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삼번왕들의 불만이 터져나온 것은 번이라는 영지를 철회하려는 청조의 행동때문이었다. 강희제는 번을 없애려고 생각하던 도중 광동의 상가희가 아들에게 번의 승계를 요청하자, 아예 번을 없애라는 철번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오삼계와 경계무도 청 조정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 번을 해체하겠다고 신청했다. 그러자 청은 이를 허락하고 운남의 오삼계와 복건의 경정충이 올린 철번 요청에 대해서도 승낙하였다. 



청조는 번을 해체한다고하면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철번요청을 승낙하는 것은 삼번왕들에게 산해관 밖으로 이주하도록 하는것을 의미했다. 강희제가 삼번요청을 불허하는 명령을 기다리던 번왕들은 강희제의 철번 승낙에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1673년 11월 21일 오삼계는 천하도초토병마대원수를 표방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명조 부흥을 부르짖으며 궐기하였는데, 남명 정권의 최후를 본인이 맞게하였음에도, 이러한 명분을 내걸었다는 것은 매우 설득력없음을 본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명 영력제의 능에서 반청복명을 이유로 거병하였다. 명분상으로는 설득력이 없을 수도 있었으나 청의 지배가 달갑지 않았던 한인들이 오삼계의 반란에 동참하였다. 운남과 사천 섬서일대의 관료와 신사들은 대거 오삼계의 진영에 참가하였다. 오삼계는 세력을 이끌어 호남으로 진출하여 중국 남부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오삼계의 군세는 청조를 궁지에 빠트리기도 했으나, 물자가 많은 청 조정에게 유리하였고, 다른 두개의 번 세력과 유기적인 작전을 펼치지 못하여 점차 수세에 몰리게되었다. 

 

오삼계에 이어 경정충도 1674년 반란을 일으켰고 상지신도 이어 1676년 광주에서 반청 거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연이은 반란에도 불구하고 강남지방의 생산시설을 점거한 청조가 승기를 잡고 반란을 진압해 나갔다. 광동과 복건의 두개 번이 먼저 청조에 격파 당했다. 경정충의 경우 1676년 청군에 투항하였고 상지신 역시 이듬해인 1677년 청군에 투항하였다. 궁지에 몰린 오삼계는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주라고 하였으나 곧 병사하고, 그의 손자인 오세번이 궈양부에서 즉위하여 황제의 자리를 이어나갔으나, 1681년 오세번마저 운남성에서 자살하 삼번의 난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진압한 것뿐 아니라 영토적 팽창과 경제적 안정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대만의 정씨 세력을 소탕하고 외몽골과 내몽골을 침입한 준가르부의 갈단을 물리쳤다. 변방의 위협을 제거하는 동시에 외몽골을 신속시켜 몽골지역의 안정을 도모했다. 또한 흑룡강 연안에서 추돌하던 러시아와는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고 국경을 확정해 두어 대내외적인 평화를 확보했다. 대만이 확보되면서 강희제는 명대로부터 이어져온 해금, 즉 바다에 나아갈 수 있는 제한을 풀고 절강성, 복건성, 광동성에 해관을 설치하여 해외 무역을 허락하였다. 무역이 재개되자 은자 부족으로 야기된 극심한 경기 침체가 지나가고 생산과 유통이 활발해졌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은이 중국으로 대량으로 유입되며 생산과 유통이 활발해질 수 있었다.

 

경제상황의 호전은 대규모 치수사업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황하의 치수, 대운하의 보수와 유지에 많은 비용을 쏟았다. 그 덕에 남방의 풍부한 물산과 세금을 북경으로 온전히 전달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강희제는 여기에 많은 노력을 쏟았다. 대내외적인 평화와 경제적 번영, 거기에 한인과 관료를 포섭하고 통제하는 정책을 통해 정치적 안정까지 더해지면서 청나라는 강희제 연간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강희제는 61년간 재위하며 청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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