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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중앙아시아사] - 이슬람과 당의 격돌, 탈라스 전투

by Timemapcatographer 2022.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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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이슬람과 당의 격돌, 탈라스 전투

무하마드가 박해를 피해서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헤지라(622년) 이후 세력을 키우던 이슬람 세력은 중앙아시아로 진출을 꾀했다. 정통 칼리프시대가 4대 시아알리를 마지막으로 661년에 마감되고 술탄을 위시한 우마이야 왕조가 건립되며 이슬람의 동방 진출은 시작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옮기고 동쪽진출을 시작했다. 중앙아시아의 상업적 성격이 짙은 도시국가들을 공격하여 공물을 통한 물자 획득에 열정적이었다. 그리고 697년 하자즈 이븐 유스프가 바스라 총독에 임명되면서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이들은 동쪽으로의 정복전쟁을 통해서 이슬람 내부에 쌓여있는 종족적 갈등을 외부로 돌려 발출해내고자 했다.

이슬람 세력은 먼저 부하라 인근 도시 바이칸드를 점령하고 712년에는 호레즘까지 정복했다. 이러한 이슬람의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낀 도시국가들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들의 안위를 도모하려했지만, 당시 돌궐의 제 2제국 부흥과 티벳에서 일어난 토번왕국의 서역 공격으로 인해 당은 이슬람의 상황까지 신경쓸 수 없었다.

실크로드, 즉 교역로의 패권을 두고 전쟁을 벌인 당과 이슬람 세력


돌궐의 세력이었던 튀르기쉬 부족은 정치적으로 독립하여 이곳에서 오아시스 도시들에 대해 적극적 군사개입을 하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이슬람과 튀르기쉬는 이곳에서 일전일퇴를 반복하며 세력싸움을 헀는데 739년 수령 술루가 피살되며 이슬람쪽으로 전쟁의 승기가 넘어가고 만다. 이슬람세력은 서투르키스탄 주민들이 개종을 하면 세금을 감면해주는 정책을 펴며 이들을 포섭해 나갔고, 서투르키스탄에서 확고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마침 당시 당나라 또한 티베트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고선지 장군을 보내며 실크로드를 정비하고자 했다. 실크로드는 당의 교역로로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이 두세력은 751년 여름 탈라스에서 만나 전투를 벌이게 된다. 당군의 지휘관은 고선지였는데 고구려 유민출신이었다. 이들은 1년전인 타쉬켄트의 국왕을 생포하여 당의 수도인 장안으로 압송하였는데 이에 현지인들은 이슬람 세력을 끌어들여 당에 대항하게 되었다.

 

고선지가 이끄는 당군과 이슬람군은 751년 탈라스 하반의 아틀라흐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닷새간 대치하던 중 당군의 카를룩 유목민이 당을 배반하고 이슬람측으로 넘어가 당군을 좌우로 협공하게 되었다. 당군은 참패를 당하고 고선지는 퇴각하여 목숨은 건졌으나 책임을 지고 면직하게 되었다. 이때 중국의 제지술이 이슬람에게 넘어가게 되고 이슬람을 통해 서양으로 전파된다.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당과 이슬람세력의 전투를 그린 탈라스전투 기록화

탈라스 전투 이후 세계 정세는 급변하기 시작한다.

당은 탈라스 전투 참패 이후 절도사인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이 터지면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 틈을 이용하여 티베트 세력이 타림분지와 하서회랑으로 진출하고 돌궐제국의 붕괴 이후 투르크계 민족들은 톈산 산맥 북방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당과의 전투에서 군사적 승리에 힘입은 이슬람은 아바스 왕조를 탄생시키고 중앙아시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당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잃고 쇠퇴할 수 밖에 없었다.

탈라스전투

중앙아시아를 두고 이슬람세력이 서쪽을 티베트가 동방을, 투르크계 유목민이 북방에서 서로 각축을 벌이는 형태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9세기에 접어들며 티베트와 투르크가 약화되면서 이슬람의 정치적 우위는 확고해졌고 이곳 주민들의 이슬람 개종은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이후 중앙아시아의 주민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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