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동북 삼성에 해당하는 만주는 크게 세가지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그중 동북부의 삼림지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북부의 풍부한 삼림은 고조선 시절 이래로 부여, 읍루, 숙신, 말갈 등이 살았고 여기에서 터를 잡고 살던 부족 '여진'은 말갈의 후예였다. 말갈족은 수나라 당나라 초기부터 존재해왔으며 8세기 발해가 건국될때는 발해에 속해 말갈 부족 중 흑수말갈의 세력이 가장 강해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당시 거란이 크게 일어났고, 요나라에 의해 발해가 멸망당하면서 말갈의 일부 세력은 남하하여 말갈이라는 명칭 대신 여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만주에 터를 잡고 살아온 이들은 스스로를 ‘주르첸’이라 불렀고 이것이 곧 한자명 '여진'으로 표기되었다.
이들 여진에서도 여러 부족 가운데 생여진 완안부 출신의 '아쿠타'라는 인물은 쑹화강의 지류인 아르추카 강에서 국가를 건설하며 국호를 ‘금’이라 하였다. 한자로 음차한 이름은 완안 아구다이며 부족적 전통을 유지하던 여진인들을 규합하는 통솔력을 보여주었다. 여진인들의 경제생활은 매우 원시적이었으나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농경에 종사하기 시작하며 성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거란과 고려와 교류하면서 이들의 선진적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성장이 본격화 되기 시작했다.
또한 여진은 668년 멸망한 고구려에서 정통성을 찾고자 했다. 금나라의 건국설화에서 함보라는 인물은 고구려인임을 이야기해 고구려의 정치적 위상을 이어받고자 했다. 금나라인들은 삼림지대의 특산물을 판매하여 경제적 기반을 닦고 말을 수입하여 군사력을 다졌다. 이러한 양적, 군사적 성장은 거란과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는데 놀라운 것은 거란과의 전쟁에서 의외로 신흥세력인 여진이 승리를 거두었다는점이다.
여진의 수령이었던 아소가 거란에 망명하는 사건이 터지자 1114년 금의 아쿠타는 군대를 이끌고 영강주를 공격했다. 여진의 공격이 대승으로 끝나자 아쿠타는 1115년 황제를 선포하고 금이란 국호를 선포했다. 여진은 1115년 1월 28일에 거란의 요를 물리치고 금나라를 세웠고, 황제가 된 야쿠타는 군세를 몰아 요동 지역의 황룡부를 함락시켰다. 당시 요나라의 황제인 천조제 야율연희는 70만의 대군을 편성하여 금나라를 공격했으나 도리어 대패를 당했다. 이후엔 1125년 요동을 정복하고 거란의 천조제를 생포하여 거란제국을 멸망시킨다. 이후 거란제국의 야율대석은 세력을 규합하여 서쪽으로 이주한다. 또한 송과 해상의 맹약을 맺고 함께 거란을 공격하자는 약속을 하기도 해서 거란의 세력을 축소시키는데 일조하였다.
아쿠타의 뒤를 이어 즉위한 동생 태종 오걸매는 곧바로 송나라 공격을 시작하여 1126년에 수도 개봉(카이펑)을 함락하고 황제와 상황을 모두 포로로 붙잡는 군사적 쾌거를 달성한다. 이를 중국사에서는 ‘정강의 변’이라 부른다. 송의 황실과 귀족들은 남쪽으로 도피하여 새로운 남송시대를 열게된다. 그러나 금은 계속적으로 군사적 압박을 강행하여 1142년 남송 희종때 ‘황통의 강화’를 맺어 회수를 양국의 경계로 삼았다.
남송은 매년 은 25만냥과 비단 25만필을 금에 바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물양은 거란에게 바치던 양보다 많은 양이기 때문에 남송에 큰 부담이 되었으며 금에게는 제국으로 나아가는 경제적 기틀이 되었다.
여진제국은 흥륭의 근거지인 만주와 남송과의 국경인 회수에 이르는 북중국을 포함했다. 이때 금나라는 현재의 베이징이라 불리는 북경을 수도로 삼았다. 여진인은 거란과는 달리 유목민이 아닌 반농반목의 경제체제를 유지했기 때문에 이들은 농경을 위해 북중국으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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