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기즈칸의 손자이자 툴루이 계의 적통인 쿠빌라이칸은 1260년 몽골제국의 5대 칸에 올랐고, 대원제국을 설립했다.1271년의 일이다.
쿠빌라이 칸은 재위 내내 제국내의 반란에 시달려야했다. 앞선 1260년 즉위 당시 아릭부케와의 갈등으로 몽골 제국은 왕권 계승전쟁에 휘말렸다. 쿠빌라이는 1260년 아릭 부케를 토벌한다고 선언하고 그해 6월 아릭 부케의 세력 일부를 쓰촨성 부근에서 제거하였다. 또한 자신의 정통성을 과시하며 자신이 적법한 계승자임을 발표했다. 아릭 부케는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고 쿠빌라이를 비난했다. 두 세력은 계속해서 카라코룸을 두고 격돌 했으며 이 일대는 황폐화 되었다.
또한 싱안링 산맥 울루스들의 맹주 나얀은 쿠빌라이가 일본 원정을 추진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징발과 통제를 강화하고 1285년에 이곳에 요양행성을 설치한것을 계기로 1287년에 6만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위기의식을 느낀 쿠빌라이는 73세의 노인이었지만 기습적으로 1287년 공격을 성공시키므로서 나얀의 반란을 진압했다. 또한 카이두는 1288년 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에 쿠빌라이 군을 물리치고 입성하였다. 몽골제국의 중심지를 상실한 쿠빌라이는 1289년에 친정을 감행했고 카이두는 자발적으로 퇴각했다.
1294년 쿠빌라이가 사망하고 후계자인 테무르가 즉위했다. 서북방의 상황과 카이두와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던 테무르는 일본과 동남아시아등 다른 대외원정을 일체 중단하였다. 그리고 제국의 군사력을 서북방 몽골초원으로 집결시켰다. 카라코룸은 카이두 세력의 공격에 대비해 방비하였다. 그리고 카로코룸을 중심으로 병력을 집켤시킨 테무르 칸의 전략은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1296년에는 아릭 부케의 자손인 유부쿠르, 시리기의 아들 울루스 부카, 카이두에 투항한 투르타카등이 귀순해왔다. 또한 1298년에는 총우르 장군의 활약으로 열세였던 전세를 회복했고 1301년 알타이 남쪽의 산지에서 대 전투가 벌어졌으나 승부는 가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카이두는 퇴각하면서 부상을 입고,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카이두 사후 중앙아시아의 맹주로 부상한 차가타이 가문의 두아는 카이두의 2인자였다. 두아는 우구데이 가문의 승계문제에도 관여하면서 카이두 진영은 심각한 내부계승 문제에 휘말렸다. 이는 계승문제와 정통성에 흠이 되었고, 카이두라는 수장의 죽음과 내부분열 문제로 인하여 두아는 1303년 테무르 칸이게 사신을 보내어 복속의 의사를 전하였고 화평을 제의하였다.
이로서 몽골 칸 울루스와 카이두 세력간의 오랜 내란은 종식되었다. 이를 공식적으로 45년간의 분쟁이라고 일컫는데 뭉케 칸 사후인 1259년 부터 1304년의 기간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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