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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로마노프 왕조

[러시아사] -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과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

by Timemapcatographer 2022.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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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과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

알렉산드르 2세를 향한 폭탄테러

크림전쟁의 패배 이후 러시아의 개혁에 착수했던 알렉산드르 2세는 때때로 그 개혁에 의구심을 가지기도 하였으나 계속해서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러시아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그의 개혁이 모두에게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1881년 알렉산드르 2세는 의회를 개설해 달라는 요구를 받아들여 의회 기구를 개설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궁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날 공화주의자(나로드니키) 인민의 의지당이 계획한 폭탄 테러에 맞닥뜨리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첫번째로 투척된 폭탄은 호위병과 마부에게만 손상을 입혔다. 황제의 마차는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마차였기에 첫번째 폭탄에 의해 황제가 입은 피해는 전무했다. 그러나 상황을 살펴보고 다친 호위병을 보기 위해 황제가 마차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두번째 폭탄이 터졌고, 이 두번째 폭탄에 의해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폭살된다. 

 

황제가 갑작스럽게 죽자 그의 후계자로 알렉산드르 3세가 거론되었다. 

알렉산드르 3세

그는 알렉산드르 2세의 2남으로 형이 결핵으로 일찍 죽자 후계자가 되어 황제로 등극했다. 러시아 제국의 13대 차르로 등극한 알렉산드르 3세는 부황과는 다르게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부황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추진에 있어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자 알렉산드르 3세는 이러한 개혁이 혼란의 원인이라 보고 정치 개혁의 길을 배격했다. 그는 차르에게 남아있는 권력이 신성하며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더 이상의 개혁은 배격했으며 이미 진행된 개혁에 대해서도 효과를 제약하려 노력했다. 

 

반동적 움직임으로 정부는 몰락해가는 귀족에 너무 견고하게 의지했으며, 러시아 정교회를 기치로 내세우고 국민을 통합하려했으나 이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었다. 그리고 전대 황제인 알렉산드르 2세대에 도입된 변화를 억제하기 위해서 ‘반동개혁'을 입법화했다. 

 

반동개혁으로 인해 급진적인 잡지는 폐간되었다. 1884년 새로운 대학령으로 대학의 자율성도 사실상 폐지되었다. 학생들은 단체를 조직하거나 공동의 대표성을 띌 권리를 박탈당했다. 동시에 차르와 측근들은 국가귀족 토지은행을 설립해서 러시아의 귀족을 돕고 지도적 위치를 강조하려했다. 이는 시대착오적이었던 것이었고, 종교적인 면에서도 시대착오적 정교회위주 정책으로 사회적 압력이 증가했다. 

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

알렉산드르 3세의 정책이 모든 변화와 개혁을 막은 것은 아니다. 그는 민족과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다면 진보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알렉산드로 3세 시기 러시아의 명재상 세르게이 비테는 러시아의 공업화를 대대적으로 추진하여 명실상부한 공업화와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이를 통해서 러시아 육군과 해군의 전력증가를 이룰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군은 예비군을 포함해 300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고, 장비적 측면에서는 모신나강 소총을 예비 여단까지 보급하고 야포 국산화에도 성공을 거두었다. 해군 또한 대규모 건함 계획을 실시해 육군은 세계 1위의 규모를, 해군은 세계 3위의 규모를 만들었다. 

 

알렉산드르 3세는 말년에 기차사고를 당하고 이 사고로 인해서 허리를 다치게 되며 건강이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헀다. 게다가 급성 신장염이 겹치면서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는 1894년 크림 반도의 리바디야에서 요양하던 도중 사망했다.

알렉산드로 3세의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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