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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사] - 레닌 사후 소비에트 러시아의 권력투쟁, 스탈린의 등장과 경제 5개년 계획

by Timemapcatographer 2022.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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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레닌 사후 소비에트 러시아의 권력투쟁, 스탈린의 등장과 경제 5개년 계획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  1879년 11월 7일-1940년 8월 21일

소비에트가 설립된 1920년대에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두가지 관점이 있었다. 첫번째 관점은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하는 좌파적 입장이다. 이들은 당과 국가의 적극적인 리더쉽을 통해 타 유럽국가에 비해서 후진적인 러시아를 빠른시일내에 선진화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좌파는 사회주의 권력이 농민대중에게 압도당하지 않으려면 급속한 산업화를 달성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적극적인 경제입안과 투자를 위해서 자본축적을 요구했는데, 이를 통해 임금과 가격인상을 국가에서 조절 할 수 있고, 이로써 농민과 민간부분을 통제할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은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원했고, 지방에서 당 비서를 임명하는 관행을 비판했다. 그리고 최대한 많은 사람이 당에 참여하고 토론의 자유를 확대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스탈린은 당의 인사권을 쥐고 있었기에 이들의 비판이 대상이 되었다.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부하린, 1888년 10월 9일-1938년 3월 15일

 

좌파들의 대척점에는 레닌이 아꼈던 동지 부하린이 있었다. 그는 1920년대 후반까지 스탈린을 포함하여 당내 다수파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들은 러시아의 후진성이 러시아 사회주의 건설의 큰 장애물이고 경제성장이 중요하다는데 이라는데는 좌파와 입장을 동일시 했지만,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민간부분을 압박하는 경제모델이 아닌 시장의 작동을 활용하는 소비모델을 강조하였다. 농민에게 사회주의를 사랑하도록 가르치려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사회주의를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결국 소외감과 분개, 사회의 분열과 반란을 초래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하린은 “평화롭고",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한다고했다. 

 

그러던 도중 레닌이 1918년 사회혁명당원 파니 카플란에 의해 암살당할뻔 한 사건 이후에, 그는 총상의 후유증과 그동안 누적된 과로로 인해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다. 1922년 총알제거 수술을 받은 직후 뇌일혈로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마지막 1년은 실어증까지 겪으면서 1924년 1월 21일 사망하였다. 

소비에트 러시아를 대표하는 3인, 좌측부터 스탈린, 레닌, 칼리닌

레닌 사후 소비에트 내부에서는 바로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레닌은 스탈린을 경계하는 유언을 남겼으나 이는 소비에트 최고위원들에 의해 묻혔고, 결국 당원자격을 통제할 수 있는 스탈린의 권력에 의해 투쟁이 좌지우지 되었다. 스탈린은 막후에서 활동하면서 트로츠키의 미사여구와 명성을 이길 수 있는 추종세력을 키워나갔다. 처음에는 트로츠키에 대항하여 카메니프 및 지노비예프와 연합했다가, 부하린 세력과 연합했다. 그리고 충분히 세력이 커졌다고 생각할 때 그들마저 제압했다. 결국 1927년 12월 27일에 개최된 제 15차 전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대회에서 스탈린은 실질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스탈린의 경쟁자들과 반대자들은 입장을 철회하거나 추방당했다. 트로츠키는 1927년 중국의 국공결렬의 책임을 뒤집어 쓰고 출당되었고, 1929년 1월 소비에트 연방에서 축출되어 1940년 멕시코에서 피살되었다. 부하린은 트로츠키 세력이 스탈린의 급진적 공업화를 지지하자, 세력기반을 잃고 1929년 정치국에서 축출된다.

 

스탈린은 공산주의자들이 쉽게 따르게 하기 위해서 이데올로기를 단순화했고 신성화했다. 그리고 일관되게 낙관론과 희망, 신념을 강조했다. 그는 소비에트의 노력만으로 성취할 수 있는 위대한 목표를 제시했고, 그가 혁명의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많은 이들이 동조했다. 스탈린은 15차 당대회를 통해서 신경제정책의 종식과 제 1차 5개년 계획을 앞세웠고, 소비에트를 자신만의 왕국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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