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 발해의 건국과 남북국시대의 시작
나당동맹을 맺은 당과 신라의 공격으로 668년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걷는다. 이후 나라를 잃은 유민들은 각지로 흩어졌다. 자신의 부족에 속해있던 이들은 각자도생의 길로 들어섰고, 676년 이후 고구려의 옛 지역은 몇 부분으로 나뉘면서 고구려의 옛 영토는 이리저리 찢겨졌다. 대동강 이남 지역은 나당 전쟁 이후 신라가 확보하였다. 당과 인접한 북쪽 요동지역은 당에 귀속되었다. 그 밖에 만주 중부와 동부와 한반도 북부 지역은 영역상 당에 속하긴 했지만 거리가 멀고 관리가 어려운 탓에 상대적으로 당나라의 간섭이 덜했다.
이 만주 지역에서 말갈족이 당의 억압적인 통치에 반발하여 봉기하였다. 이들이 봉기하면서 요서지역에서 당의 권위는 크게 위협받기 시작했고, 그때를 틈 타 요서로 강제 이주당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들은 당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금의 돈화현인 만주 목단강 유역에 도읍을 정하고 진국을 세웠다. 이 나라가 바로 발해이다.
발해는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방했다. 고구려가 멸망한지 30년 만에 후예를 자처하는 국가가 건국된 것이다. 발해는 698년 건국되어 926년 거란족의 요에 멸망하기까지 약 200년간 대동강 이남의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발해의 국호는 건국 당시에는 진이라 하였으나 713년 당으로부터 발해군왕에 책봉되면서 발해로 고쳐 불렀다. 또한 왜와 통교하며 그들의 역사서와 목간, 고문서 등에 기록이 남았는데, 기록상 나타나는 발해는 스스로를 고려라고 불렀으며 이는 고구려 계승의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발해는 건국 직후부터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방했기에 당과도 신라와도 우호적이지 못했다. 특히 당은 만주일대에서 영향력을 잃게되는 상황에 처했으니 적대적인 것은 당연했다. 이에 발해는 외교적 고립을 피하고자 몽골 지역의 돌궐에 통교하며 외교적 고립을 벗어나려하였다. 당시 당나라는 거란의 반란을 제압하고 그 수습을 하느라 만주지역을 신경쓸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옛 고구려의 땅에서 새로운 힘의 구심점이 형성되자 옛 고구려의 유민들과, 말갈 부족들이 발해를 중심으로 급속히 통합되었다.
발해는 230년간 총 15인의 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역사서 발해전에 기록된 왕은 총 13명이다. 발해의 건국조인 고왕 대조영 이후 2대 무왕이 즉위한 719년 이후에는 대외 팽창을 지속했고, 국가체제를 정비해 나아갔다. 7세기 이후 격동하던 동북아시아에는 신라, 발해가 남쪽과 북쪽에서 세력을 형성해 균형을 이루었고, 당나라도 국력의 쇠진과 내부의 혼란으로 동북아시아로의 팽창을 포기하였다. 그런 가운데에 신라와 발해는 국경을 맞댄채 당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발전에 힘썼다. 발해의 영토는 만주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중국 조선족 자치주를 기반으로 동으로는 연해주, 서로는 만주, 남쪽으로는 한반도 북부를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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