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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조선사

[조선사] - 세도정치의 등장과 흥선대원군의 개혁

by Timemapcatographer 2023.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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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 세도정치의 등장과 흥선대원군의 개혁

불에 탄 순조 어진, 1790년 6월 18일 ~ 1834년 11월 13일

조선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세워졌다. 성리학에서 말하는 세도정치(世道)란 학식과 덕망이 있는 사람이 세상의 올바른 도를 책임지는 정치를 말한다. 그러나 사회의 모순이 반복해 쌓인 19세기 조선의 상황에서는 뜻이 달리 쓰인다. 정조의 둘째인 이공이 11세의 어린나이로 23대 군주로 즉위하는 1800년부터, 헌종 ~ 철종대까지 약 60년에 걸쳐 시행된 세도정치는 부정하게 세력을 휘둘렀다는 의미에서 기세 를 사용하여 세도정치(勢道)라고 부른다.

 

정조가 갑작스레 승하하면서 순조는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했고, 이는 외척과 세도 가문이 정계를 장악하는 시발점이 된다. 이 시기의 세도 정치는 안동김씨와 풍양 조씨 등 노론 출신의 외척 가문들 정치를 주도하고 여기에 달성 서씨와 연안 이씨, 반남 박씨, 풍산 홍씨등이 혈연 관계를 통해 정권을 독점하였다. 

 

세도정치 시기는 붕당은 물론이고 탕평파나 반탕평파 같은 정치 집단 사이의 대립구도가 사라져버린 상황이므로 이러한 유력가문을 견제할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거기에 비변사가 국정을 주도하고 권력의 핵심기구로 떠오르면서 세도 가문을 견제할 육조와 의정부마저 무력화 되었다.  세도가문은 19세기 조선 사회의 누적된 모순을 개혁 할 정치적 이념이나 개혁사상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나아가 변화하는 세계의 동향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만의 정치집단을 조직해 조선 내에서 이권을 탐하며 권력을 독점하였다. 

안동 김씨 가문을 이끈 영안부원군 김조순

대표적인 세도 가문인 순조 대 안동 김씨는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의 뒤를 이어 김좌근과 김병기 등이 있었으며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정국을 주도하기 전까지 전권을 휘두르며 세도 가문의 지위를 누렸다. 헌종 즉위 이후에는 풍양 조씨 조만영 집안이 헌종의 외척으로 득세하였다. 이들은 실질적인 권력이 집중된 비변사를 장악하고 관직을 독점하였다. 물론 세도정치기에 왕실이 국정운영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순조와 효명세자가 국정을 주도하고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자신들의 뜻을 관철할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19세기 조선은 봉건 사회가 급속히 해체되는 변혁기였다. 빈번한 자연재해와 기근에도 일반 백성들은 수탈의 대상에 불과했으며 각지 고을의 수령들도 중앙 정치로부터 소외되었다. 지방사림은 향약에서 배제되었고 수령이 향약을 운영하게 하는등 수령권을 강화하는 구상을 했던 정조의 구상은 중앙정치가 문란해지자 수령의 부정을 중앙에서 견제 할 수 없다는 약점을 드러냈다. 이런 문제점은 지방 수령직의 매관매직을 성행하게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으며 농민들은 당시 소빙하기로 인한 기근과 질병으로 고통받으면서 국가의 수탈에도 시달리는 상태가 되었다.

조세부담은 점점 높아지고 불만이 높아지면서 농민과 노동자들의 연대의식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국가의 근간인 조세제도에서 삼정의 문란이 생겨나고, 비판의식이 강한 몰락 양반과 일부 상인세력이 결탁하면서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경래의 난은 조선사회에 경각심을 일으키기는 하였으나, 조선의 모순을 해결할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이끌어내는데는 실패하였다. 그 후 농민들은 임술농민봉기를 전후하여 삼남지방에서 대대적으로 봉기하였다. 

세도정치의 위정자들은 쌓여온 사회적 모순의 해결 없이는 자신들의 정권유지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봉기를 일으킨 농민의 요구사항을 해결하기 위해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사태를 수습하려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개혁안이 발표되었다. 이는 자신들이 속한 지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개혁안이었고 ,오히려 진주민란이 일어난 원인이었던 부패관리 백낙신을 1년만에 풀어주는 등 도덕성에도 문제가 있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1821년 1월 24일 ~ 1898년 2월 22일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1846년 고종이 즉위하였다. 당시 집권세력은 흥선대원군을 무능한 인물로 보고 그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형식적으로 수렴청정을 하게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조선은 또 다른 개혁기를 맞이한다. 흥선대원군은 호포제와 사창제를 실시하고 서원을 철폐하면서 당시 조선의 백성을 괴롭게하던 모순들을 개혁하였다. 서얼들의 정계진출을 가능케하고 안동 김씨세력을 축출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개혁 역시도 서세동점의 시대적 요구에 부흥하기보다는 조선이라는 봉건적 정권의 지배체제를 연장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이제 시대는 흘러 조선도 침략해오는 서양 세력 앞에 서야하는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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