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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조선사

[조선사]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조선의 의병들

by Timemapcatographer 2023.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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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조선의 의병들

삼포 중 하나인 부산포 동래 초량 왜관, 18세기

조선이 건국되고 약 200년동안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평화로웠다. 조선 건국 초기에 명과 북원이 대치하던 상황은 명이 중원을 차지하면서 명의 승리로 끝났다. 15세기에 비교적 평화롭게 교류하던 조선과 일본은 16세기에 들어 갈등이 심화되었다. 일본은 조선에 더 많은 무역을 요구하였고, 조선은 이를 거절하고 무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던 것이다. 이에 일본인들은 무역을 요구하며 삼포왜란, 을묘 왜변과 같은 변란을 일으켰다. 일본의 요구에 조선은 비변사를 설치하며 일본의 정세를 살폈다. 동시에 국방을 강화하자는 10만 양병설 등이 주장되었으나 이는 붕당간의 견해차이와 예산 등의 문제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1537년 3월 17일 ~ 1598년 9월 18일

한편 일본에서는 전국시대가 종료되었다.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수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일된 전국이 아슬아슬한 상태임을 알고 각 영주의 병력들을 외부로 돌려 군사력을 소모하려는 목적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침략에 앞서 중앙집권적 군사 지휘체계를 확립하고,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을 통해 얻은 조총으로 군대를 무장하였다. 그리고 조선에 명을 치러가는데 길을 열라는 “정명가도"의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군에 공격당하는 부산진

선조 25년인 1592년 일본이 20만의 병력으로 부산진을 침공하면서 임진왜란은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나고야에서 출진하여 가츠모토와 쓰시마를 거쳐 조선 부산진으로 습격해 들어왔다. 4월 13일 상륙과 동시에 부산진이 함락당하고, 순식한에 북상한 일본군에 의해 5월 2일에는 한양에 일본군이 들어왔다. 일본의 경우 전국시대에 군대의 우두머리인 영주만 잡으면 전쟁이 끝나는 경우가 있었기에 일본군은 한양을 목표로 전속력 진군하였다. 당시 조선 관군은 병력부족과 200년이나 이어진 평화에 이렇다할 전투 한번 없이 일본군에게 속절없이 무너졌다. 조정이 파견한 신립장군은 충주에서 일본군에 패배했고, 함락된 도성을 재탈환하기 위해 북진하던 하삼도의 대군이 수원과 용인에서 대패하자 몽진길에 오른 선조는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6월 이후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과 승병들이 일본군과 격돌하면서 임진왜란의 판도가 변했다. 거기에 수군이 해상에서 일본군의 선단을 격파하면서 보급선을 끊자 상황은 호전되었다. 양반과 전직 관리들이 지방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지도하였다. 인근 지리에 밝은 이점을 살려 의병들은 적은 병력으로도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었으며 새롭게 조직되는 관군에 편입되며 적에게 대항했다. 또한 조선 수군은 일본군보다 우수한 선박과 화기를 사용하였는데, 거북선과 총통의 활용은 해전에서의 승리를 이끈 주역이었다. 이순신의 지휘아래 옥포, 당포, 당항포, 부산포 등에서 수군은 큰 전과를 올렸고, 특히 한산도 대첩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순신은 남해안 일대에서 제해권을 장악하고 일본군의 보급선을 완전히 끊으면서 전쟁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평양성 전투도

의병과 수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전쟁 초기 수세에 몰렸던 조선은 점차 반격을 가할 수 있었고, 12월에는 명나라의 이여송이 군사 4만 3천을 이끌고 참전하면서 일본군을 본격적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고, 행주산성에서 화차 300량을 동원해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등 전쟁을 점차 조선에 유리하게 만들었다. 행주치마로 유명한 행주산성에서 대패한 왜군은 한양을 포기하고 경상도로 후퇴하여 전쟁을 마무리 하려 했으며, 조선도 전열을 정비해 일본군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준비했다. 그러나 전선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상황에서 3년에 걸친 휴전 회담이 결렬 되자, 1597년에 일본은 조선을 다시 침입하는데 이를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유재란은 북상하는 일본군을 직산에서 조명연합군이 저지하고, 해상에서는 이순신이 명량대첩을 통해 일본군의 배 300척을 단 12척으로 물리치면서 정유재란은 끝났다. 

순천왜성

남해안 일대로 후퇴한 일본군은 곳곳에 일본식 성인 왜성을 쌓고 장기 농성을 준비했으나, 일본에서 우두머리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결국 철군을 결정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동아시아의 판도를 바꾼 전쟁이었다. 명은 임진왜란의 여파로 재정적 결핍으로 왕조가 쇠퇴하기 시작했고,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세력이 나뉘였다. 도요토미의 남은 세력인 동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서군으로 나누어 다시 내전을 시작하였다. 이들의 싸움에서 서군이 승리하여 도쿠가와 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에도 막부가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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