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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근-현대사

[근대사] - 한반도 분단과 미군의 한반도 진주, 미군정 치하 민중의 삶

by Timemapcatographer 2023.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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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 한반도 분단과 미군의 한반도 진주, 미군정 치하 민중의 삶

진주하는 미군, 떠나가는 일본군

1945년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서 한반도로 들어온 미군은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점령군으로서 38선 이남의 지역에서 군정을 실시하였다. 미군정이 정식으로 실시되자, 남한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실질적인 행정조직을 마련한 건국준비위원회나 귀환을 준비하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한국인의 정치집단들은 상황이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미군정은 한국인이 조직한 정치집단을 모두 배제하고 미군정만이 유일한 공식 정치단체임을 선포하였다. 이는 사회주의적 단체의 설립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미군정은 경제체제는 일제가 실시하던 전시 통치제제에서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당시 시대적인 상황과 남한만의 특수한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미국적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이식하였기 때문에 해방정국의 경제상황은 사실상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수많은 시행착오와 식량문제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많은 민중 특히 서울 시민들은 많은 불만을 표출했으며 이러한 불만은 때때로 민중봉기라는 충돌로 나타나기도 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신한공사로 탈바꿈했다.

해방 직후 농민과 노동자들은 일본인 지주나 기업가들이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버려둔 생산시설을 입수했다. 일부 일본인들은 한국인 관리자에게 생산시설을 판매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일본인으로 부터 인수한 자산을 자치적으로 관리와 경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러한 관리 등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이들의 토지나 공장을 적산(敵産)으로 파악하여 모조리 몰수하였다. 동시에 이렇게 압수된 재산은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에 신한공사를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토지와 공장 등 일본인의 재산을 유상으로 인수했던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큰 반감을 샀다. 

미군의 식량공출에 대항

해방 당시 한국 사회가 안고 있던 가장 큰 문제는 토지 문제였다. 남한 사회의 농민 절반정도가 소작농이었으며, 순수한 자작농은 10%에 불과했다. 게다가 소작농들은 50%가 넘는 높은 비율의 소작료를 내야했다. 이런 고율의 소작료에 시달리던 소작농들은 해방이 되자 토지개혁을 요구하면서 현상태에 산적한 생존문제 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소작료를 33% 정도로 낮추고 지주가 일방적으로 소작 계약을 깨뜨리지 못하게 하려는 정도로 이 문제를 무마하려 했다. 당연히 농민들은 이러한 미군정의 정책에 반발하며 토지 몰수와 재분배, 소작료 재조정 등의 내용을 담은 토지개혁을 요구했다.

미군정이 식량 정책 역시 해방정국의 혼란에 한 몫했다. 미군정은 일제가 시행하던 식량 배급제 대신 자본주의적 미곡시장 자유화 정책을 고수했는데, 이는 남한의 특수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정책이었다. 급작스러운 자유화 정책으로 쌀시장의 쌀은 모두 자본가가 흡수하여 쌀 가격이 폭등하였다. 쌀을 소비하는 일반 서민은 쌀을 구경하기도 어려운 상태가 되었고, 매점매석이 횡횡하여 지주나 자본가 등은 커다란 이익을 본 반면에 많은 국민들은 기아의 공포에 시달리게 되었다. 상황이 좋지 않자, 미군정은 1946년 1월 뒤늦게나마 배급제로 정책을 바꾸고 쌀을 강제로 매입했다.

 

그러나 뒤늦은 배급제 정책에서도 문제가 발생해 농민들에게 큰 손해를 끼쳤는데, 미군정이 수매가로 쌀을 매입하는 가격은 시가의 20% 내지 30%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는 생산비도 충당할 수 없는 가격이었고, 이 가격으로 쌀을 강제로 매입해 가는 것은 농민들의 쌀을 수탈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가 물러간 뒤 삶이 나아지리라 생각한 수많은 한국인의 기대감은 미군정에 대한 반발로 바뀌었고, 농민들은 식량을 숨기거나 미군정에 대해 투쟁하기 시작했다. 

1946 10월 대구에서 일어난 시위

불만이 쌓여 터진 것 중 하나인 철도노동자 파업은 7월 이후 전국으로 확대되어 열차가 거의 운행되지 못할 정도였다. 철도노동자의 파업이 9월까지 이어지자 미군정은 파업 뒤에 조선공산당이 관여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공산당 간부들을 체포하기 위해 체포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로 탄압당한 노동자들은 더욱 반발했으며 10월 1일에는 결국 대구에서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대구 시민과 노동자들은 국민의 식량문제 해결과 임금인상을 요구했고, 친일 경찰의 재임용에 반발했다. 미군정은 대구에서 일어난 사태를 진정시키기위해서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경찰이 시위 군중에게 총격을 가해 2명이 사망했다. 결국 일제강점기와 다를 것없는 해방정국에 한국인들의 환상은 천천히 깨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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