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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사/영국사

[영국사] - 스튜어트 왕조와 영국 혁명의 전조, 권리청원과 의회 해산

by Timemapcatographer 2023.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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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사] - 스튜어트 왕조와 영국 혁명의 전조, 권리청원과 의회 해산

스튜어트 왕조 개창자 제임스 6세/1세 (1566년 6월 19일 ~ 1625년 3월 27일)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튜더왕조는 단절되었다. 이에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이자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가 영국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였다. 이는 절대왕권과 의회가 국민적 지지아래 활동하는 튜더왕조의 절대왕권적 통치와 이별하게 되는 사항이었다. 

 

제임스는 영국의 현실을 자각하지 못한채 자신의 신념대로 왕권 신수설을 주장하면서 이를 실천하려하였다. 의회는 이에 반대의사를 표명하면서 절대왕권과 의회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그는 청교도를 박해하면서 종교적 갈등도 일으켰다. 일부 청교도들은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다. 

 

영국에서 왕과 의회의 대립은 계속 이어졌다. 의회는 왕이 필요로 하는 재정을 허가 해줄 생각이 없었고, 왕은 개개인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방법을 맞섰다. 또 제임스가 에스파냐와의 전쟁을 종식시키면서 약탈로 먹고살던 이들의 불만이 불거져나왔다. 왕이 왕자비를 에스파냐에서 맞이하려 하자, 이번에는 의회에서 반대하며 대항의서를 들고 나왔다. 의회는 왕을 견제하는 하나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찰스 1세 (1600년  11월 19일 ~ 1649년  1월 30일)

제임스 1세 왕위를 계승한 찰스 1세는 선왕보다 영국의 현실에 더욱 어두운 사람이었다. 그는 선왕처럼 청교도를 박해했다. 대부분의 청교도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였지만, 일부는 영국 내부에서 왕에게 대항하는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때 제임스가 에스파냐와의 전쟁, 프랑스와의 전쟁에 말려들면서 국가적으로 재정이 궁핍해졌는데, 돈이 부족했던 찰스는 의회의 허락없이 세금을 부과하게 된다. 그럼에도 돈이 모자르자 의회를 소집한 찰스에게 의회는 권리청원을 내세우고 찰스는 부득이하게 이를 승인한다. 

 

의회의 완강한 반항에 놀란 찰스는 다시는 의회를 소집하지 않겠다는 작정으로 11년간 자의적 전제정치를 실시했다.그는 선박세같은 자의적 과세를 시행했고 측근에게 각종 독점권의 혜택을 주기도 했다. 비헌법적으로 의회의 승인없이 과세하는 비타협적이고 완강한 태도는 결국 영국에 혁명이라는 새로운 바람을 불러오게 된다. 

 

이에 영국사회에는 젠트리 층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반왕세력이 구축되어갔다. 당시 심한 불경기 속에 수출의 주요 품목이던 직물 수출도 신통치 않았으며, 농작물의 작황마저도 좋지않았다. 찰스의 재정줄이던 런던의 대상인들도 그의 무모한 경제 정책에 치를 떨었으며 그가 측근에게 남발하는 독점권으로 인해 이들도 피해를 보면서 불만이 쌓여갔다. 

1642년 에지힐 전투가 열리기 전날의 찰스 1세

그러던 중 1637년 대주교 로드가 스코틀랜드에 영국국교회를 강요하면서 소요사태가 발생하였다.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단결하여 완강히 저항했고,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찰스가 런던의 대상인들에게 전쟁자금을 요청했을때, 이들은 그것을 거절했다. 전비를 조달치 못한 찰스는 의회를 소집했으나, 여기서도 전쟁 비용은 통과되지 않았고, 찰스는 의회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에서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찰스는 다시 의회를 소집한다. 1640년 10월에 소집된 이 의회는 1653년에야 해산되는 장기의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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