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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사/영국사

[영국사] - 찰스 1세와 영국 청교도 혁명의 시작

by Timemapcatographer 2023.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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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사] - 찰스 1세와 영국 청교도 혁명의 시작

찰스 1세의 장기의회의 선거 결과는 의회파의 강세와 국왕파의 약세로 나타났다. 찰스1세의 폭정과 의회의 의원들을 체포하려 했던 행동으로 인해 그동안 이어져온 협조는 사라졌다. 이는 스튜어튜 왕조에 대한 의회의 협조는 더 이상 없을 것이란 의미였다. 의회는 찰스 국왕이 행해온 세금같은 지금까지의 폐산을 일소하고, 과세를 폐지했다. 이는 영국 국왕이 휘두르던 절대왕정에 대한 제한이자 개혁작업이었다. 의회의 작업은 성실청(Star Chamver)이라는 특별법정 같은 왕권의 특별법정을 해체하고 강압적인 국교회 정책을 철회하며, 3년마다 의회의 정기적인 소집을 결의했다. 

 

장기의회의 개혁작업과 더불어서 억눌렸던 영국사회는 이때를 기점으로 언로가 트이기 시작한다. 정치책자가 쏟아져 나오면서 민중이 정치에 참여할 기세를 보였다. 여기에 당시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대규모 반란은 왕과 의회의 대립을 극단적인 상태까지 몰고 갔다. 

1640년 재소집된 잉글랜드 의회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반란은 영국의 스트라포드가 행한 강압적인 정책과 영국 신교도들과 가톨릭계 스코틀랜드인의 갈등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의회는 이 군대를 찰스에게 맡기는 것을 꺼렸다. 의회는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왕의 동의를 받지 않고 민병대 소집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으로 의회는 군대지휘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잉글랜드 내전 상황(1642년 - 1645년)

민병대 소집법이 통과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찰스는 의회의 비준 없이 독자적으로 군열 위임령을 선포하고 의회를 향해 적의를 드러낸다. 동시에 국왕은 함프덴을 비롯한 반왕파의 의회지도자 다섯명을 체포하려고 했으나 이들은 체포를 피해 도망친다. 양측의 갈등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각자 병력을 모집하면서 국왕과 의회의 갈등은 1642년 여름이 끝날 무렵 내전으로 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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