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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사/프랑스사

[프랑스사] - 혁명정부와 로베스피에르, 테르미도르 반동과 나폴레옹의 등장

by Timemapcatographer 2023.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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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사] - 혁명정부와 로베스피에르, 테르미도르 반동과 나폴레옹의 등장

 

샤를프랑수아 뒤 페리에 뒤무리에 장군과 네르빈덴 전투(1793)

프랑스 군은 전선에서 패전에 패전을 거듭했다. 네르빈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에 완전히 패배한 프랑스 뒤무리에 장군이 1792년 4월 프랑스 공화국에 반기를 들어 쿠테타를 시도하려다 실패하고 오스트리아 진영으로 도망친 사건이 일어나자, 국민공회의 지롱드파는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여기에 고물가와 식량부족에 허덕이던 파리의 민중이 국민공회를 습격하는 일까지 발생하자, 그해 6월 2일 국민공회는 지롱드파 지도자들을 숙청하였다.

 

지롱드파의 숙청 이후 주도권을 쥔 산악파는 모든 봉건적 공납을 무상으로 폐지하므로써 농민층의 완고한 지지를 받았다. 여기에 6월 24일 로베스피에르의 주장이 반영된 새로운 93헌법이 채택되었다. 93헌법은 보통선거를 규정한 민주주의 헌법으로 사회의 목적은 공공의 행복이라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 헌법은 국내외의 비상상황으로 인해 실시가 보류되었다. 

1791년  도미니코회  도서관에서 열린 자코뱅 회합.

그렇다면 그 비상상황은 무엇인가. 파리에서의 지롱드파 숙청이후 지방의 지롱드파 계열 연방주의자들은 반란을 일으킬 움직임을 보였다. 리옹, 투울루즈, 보르도, 마르세이유 등 도시들이 반란상태에 들어갔고, 국경에서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군이 줄기차게 공격해왔다. 중앙인 파리에서는 고물가가 지속되고 아시냐 지폐의 가치하락으로 인해 식량난이 생겨 민중이 동요하였다. 이러한 민중의 동요를 파고든 극단적인 과격파의 행동 역시 국민공회가 극복해야할 비상상황이었다. 

 

국민공회는 국민총동원령을 내려 18세부터 25세의 남자를 전면적으로 징집하고 물가와 임금의 통제에 나섰다. 1793년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하는 공안위원회는 스스로 혁명정부임을 선언하면서 10월과 11월에 왕비와 반혁명분자, 지롱드파 의원을 대대적으로 처형하였다. 이때를 공포정치, 또는 자코뱅 독재로 부른다.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로베스피에르는 모든 국민이 자기능력에 따라 일하며 빈곤과 부의 차이없이 생활할 수 있는 덕치주의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을 이념으로 삼았다. 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혁명세력은 단결해야하며, 단결을 방해하는 분열적 행위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1794년 봄 에베르파와 당통파를 단두대로 보내고 반혁명적 인사의 재산을 몰수하여 애국자에게 분배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인 움직임은 자코뱅파의 단결을 약화시킬 뿐이었다. 

반로베스피에르파에 의한  테르미도르의 쿠데타

다만 로베스피에르의 집권기 대외적 상황이 나아졌다. 국내정세는 안정되었고, 프랑스 혁명군은 플뢰릐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하였다. 벨기에를 확보하였고 국민공회와 민중도 공포정치의 긴장된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결국 1794년 7월 27일, 즉 테르미도르 9일, 국민공회 내의 반로베스피에르파 의원들은 연설을 준비하던 로베스피에르에게 독재자를 타도하라며 발언을 중지시켰고, 그의 체포와 고발을 결의하였다. 지나친 공포정치로 인한 반작용이었다. 이를 테르미도르 반동이라 한다.

 

로베스피에르는 어떠한 구원도 받지 못한 채 자신의 충실한 협력자 생쥐스트와 쿠통과 함께 단두대의 처형장에 오르게 되었다.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으로 프랑스 혁명은 일단락 되게 되었다. 테르미도르 반동을 주도한 의원들은 혁명재판소를 해산하고 공포정치의 기구들을 해체했다. 통제경제도 포기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적 문제들은 산적해 있었고, 고물가와 식량난, 민중의 봉기는 해결되지 않는 난제였다. 혼란이 가중되던 중 부르주아지와 농민들은 허약한 정부대신 자신들을 지켜줄 세력으로 군대에게 눈을 돌렸는데, 그 결과 1799년 11월 나폴레옹이 쿠테타를 일으켜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막을 내리고 나폴레옹의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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