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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사/프랑스사

[프랑스사] - 나폴레옹 체제의 유럽과 대륙봉쇄령, 나폴레옹의 몰락의 시작: 러시아 원정

by Timemapcatographer 2023.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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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사] - 나폴레옹 체제의 유럽과 대륙봉쇄령, 나폴레옹의 몰락

황제가 된 나폴레옹 / 제임스 길레이, 10년만의 첫키스 또는 대영제국과 프랑스 시민의 만남 (1803)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고 국내외 전쟁을 종결시키면서 맺은 영국과의 아미앙 조약은 영국에게 불리한 조약이었다. 영국은 전비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불리한 조약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영국 내부의 문제가 해결되면서 1803년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교전상태로 돌입했다. 동시에 1805년에는 다시 대불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의 육군에 공격당한 유럽국가들을 포섭했다.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이 3차 대불동맹에 참여했다. 

트라팔가르 해전을 묘사한 그림. J.M.W.터너작(유화,1806~1808)

나폴레옹도 육군으로 공격할 수 없는 영국을 희대의 숙적으로 여겼고, 해군이 강한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고 영국의 대불동맹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1805년 10월 프랑스와 에스파냐 연합함대는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 넬슨제독에게 패배를 당하며 나폴레옹은 영국 침공 계획을 접어야만 했다. 그러나 해군이 필요없는 유럽전선에서 프랑스군은 연이은 승전보를 울렸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울므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1805년 12월  아우스테롤리츠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크 조약에서 영토의 일부를 프랑스에게 양도하였다. 

틸지트조약 (1807)

1795년 맺은 바젤조약으로 평화를 유지하던 프로이센도 프랑스가 동쪽으로 강하게 영향력을 확대하자 1806년 전쟁을 시작하였다. 프로이센의 육군은 프랑스의 육군에 견디지 못하고 예나, 아우에르쉬타트에서 크게 패하여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되었다. 1807년 틸지트조약에서 프로이센은 엘베 서쪽의 영토와 폴란드 분할로 얻은 땅을 상실했고, 상비군 병력의 수를 4만 2천명으로 제한당했다. 

1811년  당시의 유럽의 상황 - 진한 푸른색:  프랑스 제국 / 옅은 푸른색: 프랑스의 위성국 및 점령지 / 희미한 푸른색:프랑스에 의해 대륙봉쇄령에 강제 참여한 국가들

나폴레옹은 압도적인 육군력을 바탕으로 유럽대륙의 지배자가 되어 통치했다. 프랑스 제국을 중심으로 나폴레옹 일가에 의해 통치되는 위성국가들, 여기에 패전으로 인해 프랑스와 동맹국이 되어야 했던 나라들이었다. 나폴레옹의 지배권을 벗어난 나라는 바다 건너 영국 뿐이었다. 나폴레옹은 유럽대륙의 영향력을 기반으로 영국의 시장을 봉쇄하는 이른바 대륙봉쇄령을 실시했다. 영국 해군의 아성을 넘을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1806년 직접적인 침공을 단념하고, 베를린 칙령을 통해 유럽대륙과 영국의 통상을 금지했다. 영국의 경제에 타격을 주려는 목표였으나, 대륙의 여러 유럽국가들이 더 극심한 경제적 타격을 입어 효과는 미미했다. 

1808년 6월 6일에 조제프는 스페인 왕으로 새로 등극하였다.

대륙봉쇄령의 실패는 나폴레옹 시대의 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여기에 나폴레옹에 점령당한 유럽국가들에서는 민족주의와 각성을 위한 움직임이 전개되었다. 에스파냐에서는 나폴레옹의 형이 왕으로 즉위하였는데, 민중은 이에 대항하여 궐기하였다. 에스파냐에서 일어난 궐기를 영국이 지원하면서 반 나폴레옹 투쟁은 힘을 얻었다. 나폴레옹은 30만 병력을 투입하여 이들을 진압하려 했으나 저항을 꺾지 못하였고, 뒤이어 이어진 러시아 원정에 일부 병력이 동원되면서 에스파냐 방면의 프랑스군은 에스파냐 저항군보다 열세인 상태에서 전투를 치를 수 밖에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퇴각하는 나폴레옹

프랑스에 대항한 것은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는 프랑스가 발칸반도와 동유럽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여기에 프랑스가 대륙봉쇄령까지 내리자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에 대해 원정을 갈것을 천명하고 1812년 70만에 이르는 군대를 편성하여 러시아에 들어갔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대규모 병력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초토화 작전을 펼치며 후퇴를 거듭했다. 1812년 모스크바에 도달한 프랑스군은 불타고 텅 빈 모스크바를 점령했으며, 강화요청에도 러시아는 묵묵부담인 상태가 지속되자 회군을 결정한다. 러시아군은 회군하는 프랑스군을 등뒤에서 공격했으며 곧 겨울이 다가와 프랑스군을 휩쓸었다. 70만의 병력 중 생존자는 25%에도 미치지 못했다. 

 

러시아 원정의 실패는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속화 시킨 촉매였다. 원정 실패 소식은 나폴레옹의 지배하에 있던 모든 피지배 민족의 궐기를 불러왔고 결국 1813년 제 6차 대불동맹으로 편성된 연합군이 라이프치히에서 프랑스군을 패배시키면서 나폴레옹의 통치는 결국 종료되었다. 1814년 대불동맹 연합군은 파리에 입성하였고, 나폴레옹은 퇴위 후 지중해의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빈 체제는  빈 회의 (1814~1815년) 이후로 성립된  유럽 의 국제 질서 / 빈 체제 하 1815년의 유럽 지도

승리한 연합군은 전후 유럽의 체제를 논의하기 위해 빈에서 회의를 진행하였고, 이후의 세계를 빈 체제라고 칭한다. 프랑스에는 루이 16세의 동생이 돌아와 18세로 즉위하여 왕정복고를 알렸고, 1814년 입헌군주제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프랑스 민중은 나폴레옹을 원하고 있었고, 이에 나폴레옹은 유배지 엘바섬을 탈출하여 1815년 3월 파리로 돌아와 황제의 자리에 다시 올랐다.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사망한 나폴레옹

나폴레옹의 복귀는 즉시 대불동맹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시 황제위를 되찾은 나폴레옹은 즉시 군대를 편성하였다. 대불동맹 측 역시 7차 대불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에 맞섰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은 돌아오지 않았고, 프랑스군은 워털루 전투를 마지막으로 연합군에게 패배하였다. 나폴레옹은 두번째 패배와 두번째 퇴위를 받아들여야했다. 그는 완전히 실각하여 삼엄한 경비 속에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다. 프랑스의 황제는 남대서양의 조그만 섬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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