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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중국사]- 당의 건국과 당 태종 이세민 치세, 여당전쟁의 이야기

by Timemapcatographer 2024.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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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당의 건국과 당 태종 이세민 치세, 여당전쟁의 이야기

당의 초대 황제 고조 이연, 태종 이세민

당의 창업자는 고조 이연이지만 수나라 말기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실질적으로 창업을 주도한 인물은 2대 황제 당 태종 이세민이었다. 이는 훗날 조선의 창업자 이성계의 아들들이 실질적으로 조선의 창업에 앞장선 것과 매우 유사하다. 당 고조 이연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세민은 장안성의 북문인 현무문에서 황태자인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을 살해하고, 아버지로부터 사실상 강제적으로 양위를 받았다. 이를 현무문의 변이라고 부른다. 변 사건 이후 2달이 지나 아버지로부터 황위를 이어받아 29세에 황제가 된 23년간의 태종의 정치는 후세에 ‘정관의 치’라 불리며 높게 평가되었다. 

 

이런 정관의 치세를 연 태종의 정치에는 세가지 조처가 있었다. 태종은 오경정의를 편찬하여 남북조 시대에 갈라진 경서 해석에 대한 차이를 통일했다. 명분은 경서 해석의 통일이었지만 사실상 당 황실과 자신에게 맞게 경서해석을 통일한 것이었고 이를 통해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정관씨족지를 편찬하여 당시 최고의 문벌이었던 박릉 최씨의 서열을 끌어내리고 황실과 외척을 올려두었다. 이로써 남북조 시대 사회적 계층 질서를 황실 중심으로 바꾸는데 성공하였다. 또 관찬 역사를 열어 사관을 협박하여 실록을 봄으로써, 역사가 정치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도덕적, 정치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완과 업적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630년에는 북방 돌궐제국을 멸망시키고 탱그리카간, 천가한 호칭을 얻었다. 호월일가라는 태종의 종족관으로 농경과 유목지역을 총괄하는 최고 통치자로 인정받았다. 당 태종대에 당 제국은 만국내정과 화이대동의 세계제국으로서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 태종의 정치는 이상적인 것으로 평가받지만, 그의 치세동안 당은 수의 국력을 절대 넘어서지 못했다. 또한 동생의 부인을 비로 끌어들이고 자신의 혈육을 살해하는 짓을 저질렀다. 이는 수 양제와 매우 유사한 행태이지만 수양제는 희대의 폭군으로 그는 명군으로 정형화 되었다.

 

태종은 당의 건국 당시의 전쟁에서도, 또한 고구려 원정 이전까지 연전 연승하며 전장의 백전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당의 영토팽창 정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으나, 고구려 공격만큼은 성공하지 못했다. 645년 2월 낙양을 거쳐 고구려 정벌을 떠났다. 약 30만의 병력을 데리고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공격해 함락하였다. 요동성은 고구려의 대성으로 이 곳을 빼앗긴 것은 고구려가 넓은 요동 땅의 영향력을 잃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안시성에서 고구려가 당의 공격을 막아내고 겨울이 오면서 당의 1차 고구려 원정은 실패하게 된다.  이후에도 2차와 3차에 걸쳐서 당은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요동 방어선을 공격하는데 실패하여 당의 고구려 원정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당 태종은 자신의 염원인 고구려 공략을 마치지 못한채 죽었다. 그 후계는 원래 황태자 이승건이 있었으나, 불량하다하여 폐하였다. 이후 9남 진왕 이치가 황태자가 되었고, 그가 당 고종이 되었다. 후계자인 당 고종이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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