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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중국사]- 고구려 멸망의 주인공, 당 고종과 여황제 측천무후

by Timemapcatographer 2024.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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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고구려 멸망의 주인공, 당 고종과 여황제 측천무후

당 고종은 당 태종이 마무리 짓지 못한 고구려 원정과 나당전쟁을 마무리하고 동쪽의 정벌을 마무리한다. 비록 신라는 동쪽에 남아있었지만, 가장 위협적이었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요동의 철광석과 만주의 생산력에 대한 것들을 이미 차지한 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한가지 고종대에 주목할만 것은 중국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여자 황제, 측천무후가 있다. 그녀는 당 태종의 후궁으로 있다가, 태종이 죽자 감업사의 비구니로 출가한다. 당시 법도로는 후사를 두지 못한 선제의 후궁은 비구니가 되어야했다. 그러나 그를 눈여겨 보던 태종의 아들 고종은 그를 다시 불러들여 후궁으로 삼았다. 어머니뻘이던 여자를 다시 자신의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그후 후궁의 자격으로 고종의 장남 이홍을 출산하였다. 이 출산으로 그는 후궁에서 비로 승격된다. 

 

고종의 황후이던 왕씨는 654년 측천무후의 딸이 죽은 사건을 계기로 폐서인 되고, 측천무후는 결국 고종의 황후가 된다. 이때가 영휘 6년 655년 10월 13일이었다. 

그녀는 황후로서 35년간 조정을 장악하였고, 중국 고대의 이상 국가인 주나라를 본따 국호를 ‘주’로 바꿔서 당 왕조를 중절시켰다. 그녀가 황제로 등극한 것은 그녀만의 탁월한 능력이 있지만, 여성의 권한이 강한 당 왕조의 분위기도 한몫하였다. 그녀는 서위시대 이래로 강고하게 중앙정치를 주도하던 관롱집단을 정계에서 몰아낼 정도로 비상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앞서 고종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의 현명함을 두려워한 측천무후는 황태자가 된 자신의 아들들을 독살한 후 사이의 세번째 아들 이현을 황태자로 삼았다. 그는 형들과 달리 유약하고 어머니에 말에 순종하는 아들이었다. 이후 고종이 683년 사망하자 이현이 황위에 올라 중종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되지 않아 측천무후의 손에 폐위 되었고, 자신의 막내아들을 다시 황휘에 올려 예종이 되었다. 그때부터 측천무후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정사를 관장했다. 이러한 그녀의 행보에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684년 9월 양주의 서경업이 군사를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곧 진압군에 의해 평정되었다. 또한 당 고조 이연의 11남 한왕 이원가도 이러한 행동에 반기를 들었으나 역시도 진압되었다. 

690년 측천무후는 결국 국호를 주로 고치고 15년간 황제로서 중국을 다스렸다. 측천무후가 무씨이므로 무씨왕조, 무주시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15년간의 통치 이후 황태자 자리를 어떻게 할지 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조카 무승사나 무삼사를 황태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대관들의 반대로 다시 유폐되어있던 여릉왕 이현을 태자에 봉했다. 705년 병에 걸린 측천무후는 장간지의 요청으로 당나라의 국호 복원을 허락하였고, 결국 15년 만에 당황조가 복원되었다. 그리고 중종 이현이 다시 황제에 즉위하였다. 705년 음력 11월 2일 반세기 동안 천하를 다스렸던 측천무후는 장안 상양궁 선거전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당나라는 이후 예종의 후손들이 황위를 계속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녀는 무주의 황제가 아닌 당나라의 태후로서 태묘에 봉인되어 제사를 받았다. 사후에 당나라 황후로 신분이 복원되어 시호를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로 올렸으며, 후에 천후(天后), 대성천후(大聖天后), 천후성제(天后聖帝) 등으로 개칭 하였고, 최종적으로 올린 정식 시호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이다.

측천무후의 시대는 내치도 비교적 안정되어 통치 50년간 대규모 농민반란이 한번도 없었다는 점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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