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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중앙아시아사] - 청제국의 중앙아시아 정복과 야쿱 벡의 반란

by Timemapcatographer 2022.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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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년대 스웨덴 장교가 그린 준가르 지도

청 제국은 러시아와 네르친크스 조약으로 동쪽의 우환을 제거했다. 그리고 서쪽으로 눈을 돌려 건륭제 때인 1757년 준가르의 아무르사나를 조혜로 하여금 격파하고 난 뒤 톈산 남북의의 초원과 사막지대를 모두 정복하였다. 그리고 이곳을 새로운 영역이라는 뜻의 신강(新疆)이라고 불렀다. 신강이라는 이름은 청이 새로운 영토를 얻으면 붙이는 일반명사였다. 이곳은 "서역신강"이었다. 청은 기존의 편제와 달리 신강은 성으로 편제하지 않고 군사적인 특별구역으로 설정하였다. 청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만큼 민관이 아닌 군관을 배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또한 이 구역을 천산을 기준으로 북로, 남로, 동로로 분할하여 통치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다시 유목민이 정착할 수 없게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둔전과 요새를 건설하였다. 

 

또한 신강의 현지인들을 통치하기 위해서 청제국은 "벡"이라는 토착 지배층을 활용하였는데 이들은 정기적으로 북경을 방문하여 청 황제를 알현하여야만 했다. 또한 벡 아래에 바시라는 중간 관리가 존재하여 청조의 지배를 도왔다.

청 건륭제

청 제국은 신강 뿐 아니라 몽골도 완전히 자신의 영토에 넣어 어떠한 중국 한인왕조도 하지 못했던 막북정벌의 꿈을 이루었다. 사실 청 왕조의 몽골 지배는 성격상 다른 영역을 지배하는 것과 달랐다. 몽골에게 청의 황제는 칸이었고 청 제국은 우리의 대청제국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청의 입장에서 몽골은 강력한 리더가 나타나 통합되면 언제든 목을 겨누는 적이 될 수 있는 존재였다. 따라서 청은 몽골에 대해 결혼을 통한 회유와 통제를 적절히 사용하는 양면적인 방책을 시행하였다.

 

회유책은 주로 정략 결혼이었다. 청 황실과 몽골의 지배층은 통혼을 통해서 몽골인들에게 제국의 일원이라는 강력한 의식을 심어주었다. 홍타이지는 몽골 호르친부의 여인과 혼인하였고 그 아들이 순치제가 되었다. 또한 청과 몽골의 수장들은 내몽골 초원에서 정기적으로 만나 사냥과 연회를 즐겼다.

 

통제책으로 청은 몽골인들을 청의 군대인 팔기에 편입한 것이 있다. 청의 군대 편제였던 팔기제는 만주인들의 사회 , 군사적 정책이었지만 몽골인들에게도 효과적으로 작동하였다. 유목생활을 유지하게 하여서 기마 군대의 원천은 확보하지만 이들이 통합할 수 없도록 목지의 경계를 획정하여 그 영역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관리하고 통제하였다.  또한 몽골 각지에 대신과 군인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청의 지배책은 청의 지배를 약 200년 가까이 유지하게 하는데 일조하였다.

야쿱 벡, 1820-1877.5.30

1800년대 들어 청이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자 코칸드 칸국의 장군이던 야쿱 벡은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타림분지로 진격하였다. 이들은 동쪽으로 더 진군하여 우루무치까지 점령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100년전 건륭제가 합병했던 곳이다. 야쿱벡은 코칸드 칸국 사람으로 이곳에서 왕국을 세웠다. 영국과 러시아는 청을 견제할 목적으로 야쿱벡을 지원하였고 그의 왕국 카슈가리아를 인정해주었다. 

좌종당

그러나 청은 야쿱벡을 묵과할 수 없었고, 1875년 좌종당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해서 12만명의 공격군을 보냈다. 1876년 교전이 있었고, 좌종당은 다시 우루무치를 수복했다. 1877년 겨울에는 남진을 강행하여 발판성까지 함락시켰다. 청군은 투루판 지역에 대해 총공세를 펼쳤고 1877년 야쿱벡은 도피 도중 급사한다. 야쿱벡의 왕국은 바로 무너졌고, 가족들 모두 청군에 잡혀 포로가 되었다. 중앙아시아는 여전히 청에 의한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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