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후반 여진은 통합되지 않고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 등 3개의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중 건주여진에서 다시 5부로 나뉘어지고 5부 중 완안부에 속했던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의 나머지 4부를 모두 통합하고 건주여진의 지배층으로 부상했다.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일하자 건주여진의 통일에 놀란 해서여진 4부(여허부, 하다부, 울라부, 호이파부)는 몽골에 속한 호르친부와 내할하 5부 등과 연합하여서 1593년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이 전투에서 누르하치는 연합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였다. 할하 몽골인들은 1603년 건주여진의 누르하치에게 칸이라는 존호를 바쳤고 1616년 만주에서 여진을 완전히 통합한 누르하치는 청 제국의 전신인 후금을 건국한다.
1626년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즉위한 홍타이지는 북쪽으로의 영향력 확대를 꿈꾸었고, 몽골 전체의 맹주를 꿈꾸던 동몽골의 릭단 칸과 대립하게 된다. 1634년 릭단 칸은 홍타이지와 전쟁을 벌이던 도중 오르도스 방면으로 후퇴했다가 청해방면으로 이동하면서 곧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게된다. 릭단 칸의 잔여세력과 아들들은 1635년 홍타이지에게 투항하게되었다. 이들은 몽골 제국 당대에 사용하던 국새를 홍타이지에게 내주었다. 또한 홍타이지는 여진을 뜻하는 음차어 주션과 후금을 뜻하는 아이신 구룬이라는 말의 사용을 금하고 만주와 다이칭 구른이라는 명칭을 선포했다. 이는 곧 자신들은 금나라의 후예가 아닌 대몽골의 후계자이자 징기즈칸의 적통임을 선포한 것이다.
만주와 몽골의 관계는 홍타이지 시대에 성립되어 청제국이 멸망할때까지 그 골격이 유지되었다. 두 집단 모두 청제국의 일원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최고 지배층인 만주족과 몽골족은 지배층으로써 함께 협력했으며 완고한 청제국을 형성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청 제국은 임진왜란 이후 경제적 사회적으로 혼란에 휩싸인 명나라를 매우 쉽게 복속시켰다. 1644년 산해관을 넘어 장성 이남으로 진입하면서 명은 외부적인 공격과 혼란속에서 내부 반란으로 인해 급속도로 쇠락한다. 혼란한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킨 이자성은 시안과 개봉, 낙양을 점령하고 뒤이어 북경에 입성해서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이에 명의 숭정제는 메이산 산에서 자살을 했고, 산해관에서 오삼계의 명나라군은 청나라에 투항한다. 그리고 청에 투항한 명군은 청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자성을 토벌한다. 이는 청군 입장에서 매우 편하게 중국 대륙을 진출하는 것이었으므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청군과 명군 연합군은 이자성의 난을 빠르게 진압했고, 중국의 후베이성으로 도망간 이자성은 1645년 죽임을 당했다. 청나라는 중국 대륙 대부분을 장악했다.
청 제국은 누르하치대에 일찍이 몽골을 복속시키면서 문화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몽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박시라고 불리는 청제국의 서기들은 몽골어와 한문에도 능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발전을 통해 1599년 몽골문자를 이용하여 만주어를 표기하기 시작했고, 이를 기반으로 1620-1633년에는 몽골문자를 기반으로 만주문자를 만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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