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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청동기-철기시대

[한국사] -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by Timemapcatographer 2022.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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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고구려 세력판도

[한국사] -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조선이 멸망한 108년 이후 조선의 영역에서 여러 나라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조선의 강역이었던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거주하던 맥족이 새로운 정치체제를 수립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경 성립된 고구려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이후에 설치한 현도군을 몰아내며 5부라는 연맹체를 구성하여 국가를 성립했다. 고구려의 시조로 일컬어 지는 사람은 주몽이다. 기원전 1세기경 북쪽에 위치한 부여에서 자란 주몽은 무리를 이끌고 부여에서 남쪽으로 이주해 세력을 만들었고 고구려 지역의 토착민인 소노부를 제압하고 계루부 소속으로 연맹체에 속해 주도권을 장악했다. 고구려의 연맹체는 여러 소국과 집단으로 점철되어있었으나 결국 총 5개의 집단으로 정리되었으며 그중에서도 계루부가 왕실이 되어 연맹체가 성립되었다. 

고구려의 기병과 보병

고구려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동명왕 주몽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복을 통해 고구려의 영토를 넓혔다. 인근에 위치한 국가들인 비류국과 행인국, 북옥저 등을 정복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인근 세력에 대한 정복은 1세기 말인 고구려 6대 왕인 태조왕 대에 이르러 압록강과 동가강 유역의 소국을 완전히 정복하고 지역을 평정하였다. 동쪽으로는 동옥저를 정벌하고 남으로는 청천강 상류를 복속시켰다. 이로써 고구려는 동으로는 동해에 닿아 동옥저의 물산을 얻을 수 있었으며, 나아가 중국과의 전쟁을 대비해 후방에 생산 및 보급기지를 확보 할 수 있었다. 나아가서 태조왕은 한나라의 요동군을 공격하고, 현도군도 축출해냈다. 이러한 고구려의 팽창은 한나라가 멸망하고 난 뒤 2세기 초 성립된 북중국에 조조가 세운 위나라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계속해서 지속되었다. 

 

고구려 벽화 속 개마무사

이런 고구려의 대외적인 팽창은 4세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중국의 통일왕조 사마씨의 진나라가 무너지면서 북방 유목민들이 중원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이른바 5호 16국의 시대가 시작되자, 기존의 중국을 기반으로 하던 국제적인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변동기가 나타났다. 고구려는 중국의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 영토확장에 나섰다. 남으로는 중국과의 연결선이 끊어진 낙랑과 대방군을 병합하고, 서로는 요동지역을 두고 유목민과 대치했으며, 북으로는 송화강 유역의 부여를 복속시켜 영토를 크게 넓혔다. 이러한 고구려의 대외팽창은 주변에 형성된 국가들의 긴장감을 불러왔다. 

 

안악 3호분, 고국원왕 추정 벽화

4세기 후반에는 남쪽에서 세력을 키운 백제와 서쪽의 선비족으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고, 백제의 근초고왕의 공격에 의해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기도 했다. 이에 고구려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인구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국가적 개혁에 착수하였다. 소수림왕은 고대 국가적 기틀을 위해 율령을 반포했고, 태학을 설립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의 국내 통치에 주력하였다. 내부적으로 안정된 고구려는 증강된 국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고구려 19대 태왕 광개토태왕이 즉위하며 역사는 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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