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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조선사

[조선사] - 광해군의 즉위와 인조반정, 폐모살제의 뜻

by Timemapcatographer 2022.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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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 광해군의 즉위와 인조반정, 폐모살제의 뜻 

 

광해군은 1575년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의 사이에서 둘째 서자로 탄생하였다. 선비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슬하에 자녀가 없었고, 장남이자 동복형인 임해군이 있었지만 그는 포악한 성정으로 인해서 왕이 될 재목이 되지 못했다. 또한 인빈 김씨의 소생인 의안군, 신성군 모두 일찍 요절하여 광해군의 왕위 계승서열을 능가하는 사람은 없었다.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이 있었으나 그는 나이가 어렸고, 당시 임진왜란이라는 특수상황에서 분조 활동까지 거치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광해의 왕위계승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선조는 파천과 동시에 평양에서 광해를 세자에 책봉하였다. 그리고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하다가 영변에서 갈라졌다. 광해는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 등을 돌며 민심을 수습하면서 군사를 모집하는 분조활동을 폈다.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활동하면서 국가 안위를 위해 활동하였다.

전쟁 이후 선조는 자신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코자했으나 이는 결국 실현되지 않았고, 광해군은 1608년 대북파의 지지를 받아서 조선 15대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의 지지세력인 대북파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갈등을 겪은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무품, 무직자인 서인(庶人)으로 삼게하고 강화에 위리안치 시켰다. 결국 1614년 만 8세의 어린 나이에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618년에는 이이첨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다. 이러한 정치적 탄압행위는 서인에게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서인 주도의 인조반정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서인들은 인조반정의 기치로 광해군의 "폐모살제"를 주장하였다. 폐모는 인목왕후를 폐위시킨 것이고, 살제는 같은 핏줄인 영창대군을 강화에서 죽인 것을 의미한다. 인목왕후 유폐를 계기로 서인을 위시한 불만 세력이 늘어나고, 여기에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시행하는 광해의 외교노선에 반하는 세력이 늘었다. 게다가 경제적 정책의 실패는 불만세력의 저변을 넓혔다. 구굉과 이서 처음 반정을 주도하였고,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이 후에 참여하여 반정을 성공시키게 된다. 특히 이귀는 호랑이를 잡는 착호갑사 파견을 구실로 병력의 경기도와 황해도 파견을 허락받았고 이들이 반정의 주 병력이 된다. 

인목왕후가 유폐된 경운궁 석어당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서궁에 유폐되었던 인목왕후는 반정군에 합류하여 그들의 명분에 힘을 싣는다. 반정 직후 광해군은 궁궐을 탈출해 의관 안국신의 거처에 피신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밀고자에 붙잡혔고 바로 폐위되어 유폐되었다. 인목왕후는 광해군을 죽이자고 하였으나 권력없는 인목왕후의 주장은 통하지 않았다. 

 

반정 이후 북인 세력은 궤멸당하다시피하여 소북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정치세력으로서 의미를 잃었다. 광해군의 부인과 세자이던 이지는 모두 폐서인 되어 유배에 처해졌으며 유배지에서 죽었다. 광해는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옮겨 유폐되었다. 제주도 생활 4년차인 66세에 천수를 누리고 생을 마쳤다. 반정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내건 폐모살제의 뜻이 훼손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끝까지 광해를 죽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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