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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사] - 소비에트 러시아의 적백내전 승리

by Timemapcatographer 2022.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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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소비에트 러시아의 적백내전 승리

1918년 7월 예카테린부르크의 지하 포도주 저장고에서 몰살당한 니콜라이 2세 황제와 일가족 7명

1918년 여름에 처음 발발한 러시아의 적백내전은 처음에는 백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6월 말 무렵 사마라 정부의 백군은 심비르스크, 카잔, 우파를 장악했다. 적군은 반격하려했으나 체코의 지원을 받는 콜차크의 백군, 데니킨의 백군과 먼저 싸워야만 했다. 시베리아에서 진격하던 콜차크 부대는 우랄의 페름을 차지하고 볼가 강 목전에 도달했다. 이 무렵 예카테린부르크의 볼세비키는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7월 16일 니콜라스 2세와 황후, 그들의 자식들을 살해한다. 레닌의 비밀명령이라고 추정되는 이 사건으로 백군은 일련의 목표를 잃었다.

적군의 최대위기 전황도

 

하지만 백군은 계속해서 공격해들어왔다. 1919년 봄에 데니킨의 부대는 우크라이나 전역을 점령했고, 모스크바로 진격해왔다. 10월에는 오룔을 점령하고 모스크바 남부의 요충지 툴라에 접근했다. 동시에 유데니치는 에스토니아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면서 10월 16일 페트로그라드로부터 약 48키로 떨어진 가치나를 장악하고 옆도시 풀코보를 포위했다. 이러한 상황을 볼때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는 백군의 수중에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 ( 러시아어:  Лев Дави́дович Тро́цкий, 1879년 11월 7일~1940년   8월 21일 )

 

그러나 전세는 적군에게 기울었다. 유데니치의 공세는 수도를 목전에 두고 실패로 돌아갔다. 적군은 레프 트로츠키의 지도아래 조직력과 지도력을 꾸준히 발전시켰고, 백군인 콜챠크와 데니킨 두사람에 맞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1918년 6월 볼셰비키는 징병제를 실시했다. 무력으로 억누르고 징병한 인원은 500만에 달하는 병력이었고, 백군의 병력을 압도적인 차이로 눌렀다. 또한 228호 명령을 통해서 러시아 제국출신 장교들을 영입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로부터 독립하고자 했고, 이를 폴란드가 지원하면서 두 국가간에 전쟁이 발발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일부라는 생각하에 많은 장교들이 적군에 가담하면서 적군의 지휘량이 상승하였다. 또한 적군은 조병창과 철도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병력 수송과 보급면에서 백군을 압도할 수 있었다.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콜차크 ( 러시아어: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Колча́к , 1874년 11월 16일 ~ 1920년 2월 7일)

 

이러한 상황속에서 백군의 콜차크는 1919년 말 적군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고, 1920년 2월 7일 볼셰비키에 의해서 처형당했다. 데니킨 장군은 1920년 3월 말에는 아조프 해와 크림반도 지역으로까지 밀렸다.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브란겔 남작 ( 러시아어:  Баро́н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Вра́нгель,1878년 8월 27일-1928년 4월 25일)

 

백군의 위기인 상황에서 소비에트는 폴란드와 급작스러운 전쟁이 발발하면서 백군을 완전히 소탕하지 못했다. 데니킨의 후계자로 남아있던 브랑겔 장군은 남부 러시아에서 조직을 재건하고 남부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많은 지역을 재탈환했다. 그러나 적군은 전쟁을 끝내고 다시 남부전선에 집중했다. 적군의 대공세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백군은 11월 중순 연합군의 배를 타고 러시아를 떠나 콘스탄티노플로 철수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르한겔스크 같은 미약했던 봉기지역은 사실상 이미 함락당했고, 1920년 말 백군은 적군에 의해 완전히 분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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