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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발해의 건국과 남북국시대의 시작 [한국사] - 발해의 건국과 남북국시대의 시작 나당동맹을 맺은 당과 신라의 공격으로 668년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걷는다. 이후 나라를 잃은 유민들은 각지로 흩어졌다. 자신의 부족에 속해있던 이들은 각자도생의 길로 들어섰고, 676년 이후 고구려의 옛 지역은 몇 부분으로 나뉘면서 고구려의 옛 영토는 이리저리 찢겨졌다. 대동강 이남 지역은 나당 전쟁 이후 신라가 확보하였다. 당과 인접한 북쪽 요동지역은 당에 귀속되었다. 그 밖에 만주 중부와 동부와 한반도 북부 지역은 영역상 당에 속하긴 했지만 거리가 멀고 관리가 어려운 탓에 상대적으로 당나라의 간섭이 덜했다. 이 만주 지역에서 말갈족이 당의 억압적인 통치에 반발하여 봉기하였다. 이들이 봉기하면서 요서지역에서 당의 권위는 크게 위협받기 시작했고, 그때를 틈.. 2023. 1. 1.
[한국사] - 삼국 통일전쟁과 신라, 나당전쟁의 승리와 통일신라 [한국사] - 삼국 통일전쟁과 신라, 나당전쟁의 승리와 삼국통일 6세기에 들어오면서 고구려, 신라, 백제 3국간의 전쟁은 계속되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7세기에 접어들면서 전쟁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642년에 새로이 즉위한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하여 국경의 성 40여 곳과 대성인 대야성까지 함락시켰다. 또한 주변의 작은 성들을 함락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지속적인 압박에 쇠퇴해가던 백제의 전성기를 찾는듯 했다. 이에 신라의 김춘추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구려의 평양성에 방문하여 대막리지 연개소문을 알현하였다. 신라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서 고구려와 일시적인 동맹을 맺고자 하였는데, 고구려가 동맹의 대가로 한강유역을 요구하자 협상은 결렬되었다. 고구려와의 동맹 실패로 고구려 남부전선에서 신.. 2022. 12. 29.
[한국사] - 고구려 당나라 전쟁과 안시성 / 고당전쟁 / 수당전쟁 [한국사] - 고구려 당나라 전쟁과 안시성 / 고당전쟁 / 수당전쟁 고구려 정벌에 나라의 국운을 걸었던 수나라가 멸망하고 그 뒤를 이어서 당나라가 중원의 패자 등장했다. 당은 고조 이연이 618년 건국하였고, 그 이후 잠시동안 혼란해진 정국을 다스리고 내치에 신경을 쓰느라 동아시아에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고구려 역시 수와의 전쟁으로 소모한 막대한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당과의 친선관계에 돌입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다가 망한 걸 직접 목도한 당 역시 고구려를 무조건 적대시 한다는 것은 망국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 태종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당 내부에서 일어난 군사적인 움직임을 모두 평정한 당태종은 북에서 호시탐탐 중국을 노리는 동돌궐까지 복속시켰다. 또한 서.. 2022. 12. 14.
[중앙아시아사] - 위구르 제국의 등장과 당나라, 돌궐의 멸망과 안록산의 난 [중앙아시아사] - 위구르 제국의 등장과 당나라, 돌궐의 멸망과 안록산의 난 위구르 제국은 투르크계 유목민인 칙륵의 후예이다. 칙륵 또는 철륵으로 불리는데 이는 수레를 뜻한다. 이들은 바퀴가 높은 수레를 이용하여 유목을 했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605년 서돌궐의 지배 하에 있던 칙륵이 세력이 커지자 서돌궐의 카간은 칙륵의 수령들을 급습하여 죽여 세력을 억제했다. 그러자 칙륵에 속하던 부구, 통라, 위구르, 바이쿠르등이 모두 스스로를 위구르라고 칭했다. 이들은 셀렝게 강 부근에 살았으며 인구 10만에 병사의 숫자가 5만을 헤아렸다. 이 기록에 따르면 7세기 초에는 톈산 방면에 살던 투르크계 유목민 집단이 서돌궐의 공격으로 동북방 셀렝게 유역으로 이주하면서 위구르를 중심으로 세력화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2022.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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