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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사/프랑스사

[프랑스사] - 메테르니히와 구체제의 부활, 자유주의 프랑스 7월 혁명

by Timemapcatographer 2023.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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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사] - 메테르니히와 구체제의 부활, 자유주의 프랑스 7월 혁명

빈체제의 유럽과 메테르니히

메테르니히가 틀어 막으려했던 자유주의, 민족주의는 물과 같아서 개인의 노력으로 막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가 독립을 달성하고 이듬해인 1830년 7월 파리에서는 자유주의 혁명이 발생하였다. 이를 7월 혁명이라고 한다.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이 실각한 이후, 프랑스 왕실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부르봉 왕실의 루이 18세는 입헌군주제를 규정한 1814년의 헌법을 선포했다. 이 헌법은 보수적이었으며, 유권자 수가 10만을 넘지 못하는 법이었다. 동시에 혁명이 끝나고 프랑스로 돌아온 귀족과 성직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프랑스에는 구체제, 즉 앙시앵레즘이 부활하게 되었다. 이들은 혁명으로 잃은 특권과 재산을 되찾을하였고, 자신들의 정치연합체인 극우왕당파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왕인 루이 18세도 이들의 극우적 성격을 우려하여 가까이 하지 않았다. 오랜 혁명과 전쟁, 패전에 지친 프랑스 국민들은 평화와 안정을 간절히 바라면서 큰 동요 없이 루이 18세의 치세는 흘러갔다.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루이 18세와 샤를 10세

루이 18세가 승하하자 그의 동생이자 극웅 왕당파의 수령인 샤를 10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사태가 급변한다. 그는 앙시엥레짐으로 완전히 회귀하려는 반동정치를 실시하려하였다. 망명귀족의 상실한 재산을 보상하기 위해 연금을 지급하기 위해 국채이자를 낮추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시민계급과 부르주아의 반감을 사게되었다. 1827년의 총선거는 이러한 세태를 반영하여 극우왕당파가 그 기반을 상실하고 자유주의 세력이 과반수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샤를 10세는 총리를 극우파로 임명하고, 의회를 해산하고, 새롭게 선거를 실시했으나 새로운 선거에서도 반 정부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쥘 드 폴리냑, Jules de Polignac / 7월 혁명을 이끈 라파예트 

샤를과 폴리냑은 1830년 7월 25일 언론의 탄압, 의회의 해산과 새로운 선거, 선거권 제한 등을 담은 칙령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파리의 시민과 민중들은 3일간 시가전을 벌여 시청을 점령하였다. 결국 샤를 10세는 영국으로 망명하고, 부르봉 복고왕조는 붕괴했다.

"프랑스인의 왕", 루이 필리프 1세.

7월 혁명의 지도자들은 온건적인 방향으로 혁명의 마무리를 짓고자 했고, 그들은 제한선거에 입각한 입헌군주제를 지향했다. 이로써 루이 필립을 왕으로 추대하여 프랑스에는 7월 왕정이 성립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왕은 이제 프랑스국민의 왕이 되었으며, 부르봉 왕가의 깃발이 아닌 삼색기가 국기로 채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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