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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사

[유럽사] - 산업혁명에 대응한 사상의 발전: 유럽 각국의 노동운동 (영국, 프랑스, 독일)

by Timemapcatographer 2023.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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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사] - 산업혁명에 대응한 사상의 발전: 유럽 각국의 노동운동 (영국, 프랑스, 독일)

 

<영국의 노동운동>

기계를 부순 러다이트 운동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일어난 영국은 아이러니하게도 1800년에 제정된 결사금지법에 의해 19세기 초까지 합법적 노동운동이 불가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의 도입으로 노동자의 설 자리가 좁아지는 현실에 일부 노동자들은 1811년 부터 1816년까지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 운동을 벌였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악덕 고용주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저항을 벌였다. 영국의 노동자들은 결사의 자유가 없었으므로 이들의 행동은 조직화되지 못하였고, 결국 영국 당국의 강한 탄압과 고용주들의 반격으로 결국 이 시기의 노동운동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1824년 결사금지법이 폐지되면서 지하에 숨어있던 노동조합과 새롭게 결성되는 조합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결국 1834년 전국 노동조합 대연명이 결성되었으나, 이 또한 정부의 탄압과 연맹 내의 내부 분열로 해체되었다.

 

영국의 노동자들은 선거법 개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선거법 개정에도 공헌하였으나 이 역시도 정부의 적극적인 탄압에 큰 성과 없이 소멸되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숙련공 중심의 새로운 노동조합이 결성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다. 숙련공은 노동자 계급의 엘리트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온건적이고 개량주의적 노동활동을 펼쳤다. 여기에 1889년 여름 런던 부두노동자의 파업을 계기로 미숙련공과 반숙련공의 전국적 규모의 조합화, 조직화가 진행되면서 1893년 독립 노동당이라는 결실을 맺는다. 

 

영국의 노동운동가들은 노동운동의 조직화를 통해 노동대표위원회를 조직하고 1906년에는 선거에서 의원석 30석을 확보하여 명칭을 노동당으로 바꾸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지난한 투쟁 끝에 영국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정당을 갖게 되었고, 이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노동자를 대변하는 정치세력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프랑스의 노동운동> 456

프랑스 혁명

프랑스의 노동운동은 정부가 노동운동을 탄압했던 영국과는 달리 혁명이라는 특수상황 아래 전개되었다. 프랑스 왕정복고기에 잠잠했던 프랑스 노동자들은 1830년 일어난 7월 혁명에 참여하면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 시기는 프랑스에서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이도 하다. 

 

프랑스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한 샤플리에 법이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협동조합 형태의 친목단체 정도의 조직만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자신들의 사상을 담은 신문을 발간하고, 노동자들의 의식 계몽과 자신들의 활동을 알리고 있었다. 

 

1839년에는 블랑키가 500여명의 노동자를 이끌고 파리 시청을 점거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1840년에는 파리의 숙련공들이 파업을 일으키기도 했다. 동시에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저서가 잇따라 출판되며 노동자들에게 읽히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1840년대는 각성한 노동자들의 의식과 노동운동이 사회주의 사상화 함께 결합하며 현실에 적용되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1848년 일어난 2월 혁명에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은 적극 참여하여 혁명의 일원이 되었으나, 임시정부를 장악한 온건 공화파의 견제에 밀려 4월선거에 참패하고 6월 폭동에서 그 세력이 분쇄된다. 그래서 프랑스 노동혁명은 한동안 주도할 세력이 없어 10년 가까이 침체기를 맞이한다. 

 

1869년대에 나폴레옹 3세의 관용에 힘입어 활기를 되찾기만, 1871년 파리 코뮌에서 다시 패하여 세력이 쇠퇴한다. 결국 1879년에 이르러서라 프랑스 노동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 노동당의 결성은 프랑스에서 사회주의 대분열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노동조합의 총 연합체인 노동총동맹과 노동자들의 집합장소였던 BT연맹이 양립했으나 1902년에 결국 결합한다. 1880~90년대에 걸쳐서 프랑스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혁명노선을 강조하는 게드주의자부터 개혁주의가까지 다양한 사회주의자들이 분파를 형성하며 분립과 대립을 거듭했다. 그들 대부분은 의회에 진출해 입법을 통해 사회 개혁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1893년 시행된 총선거에서 당선된 50여명의 사회주의자들은 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고, 1905년 여러 사회주의 분파까지 아우르는 통합사회당이 탄생하였다. 통합사회당의 조레스는 혁명주의와 개혁주의 그 사이에서 절충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통합사회당은 당세를 착실하게 확장하였다. 

 

 

 

<독일의 노동운동>

1889년 독일 제국의회.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서 상대적 후진국이었던 독일은 노동운동의 발달과정도 두 나라에 비해 늦었다. 1840년부터 수공업자와 숙련공들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1848~49년의 3월 혁명기에는 숙련공 중심의 독일노동자형제단이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며 정치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1850년대의 보수화 추세를 거쳐서 1863년 독일노동자총연맹이라는 결실로 나타난다. 여기에 사회민주 노동당이 나오게 되고 이 두 조직은 1875년 회의를 거쳐 독일사회민주당으로 거듭나게 된다. 

 

독일사회민주당은 노동자를 위한 사회주의 정당이었으나 산하에 노동조합뿐 아니라 소비조합과 다양한 산하단체를 거느렸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반사회주의법을 발의하여 1878년 사회민주당을 간접적으로 탄압하였고, 모든 활동이 금지된 채 오직 의원출마만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1870년대부터 급격하게 진행된 산업화로 현대의 공장노동자들이 급증하면서 독일사회민주당은 선거에서 승리를 거듭했고, 1891년 결국 에르푸르트 강령을 채택하며 재건되었다. 

 

이들은 재건 당시 강령에서 자본주의 모순의 최종 해결책으로 사회주의와 계급없는 사회의 건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1890년대 베른시타인이 당의 노선에 대해 수정주의를 제기하면서 혁명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와같은 베른시타인의 수정주의는 부정되었지만 독일사회민주당은 계속 당세를 확장하여 1914년 제국의회에서 110석 이상을 차지하는 최대 정당으로 발돋움하였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의회선거는 빈곤한 하층민에게 불리한 3계급제였고, 제국의회의 선거는 보통선거였다. 이는 독일사회민주당이 최다 의석을 가진 정당이라하더라도 실질적인 권력이나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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