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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남북국시대

[한국사] - 통일신라의 전성기와 쇠락, 호족과 후삼국시대의 시작

by Timemapcatographer 2023.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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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통일신라의 전성기와 쇠락, 호족과 후삼국시대의 시작

제 29대 신라의 왕, 태종 무열왕 (603년 - 661년 6월)

진흥왕 이후 국력을 키워 29대 무열왕 대에 삼한일통을 이뤄낸 신라는 8세기 중엽 경덕왕 대까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평화와 번영, 안정을 누렸다. 그러나 8세기가 지나면서 천천히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고 이른바 "신라 하대"로 부르는 시기로 진입했다.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에서는 귀족간의 권력 쟁탈이 일어나 분열하기 시작했으며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성장하여 새로운 형태로 영지화 하여 주민에 대한 직접 지배를 시작했다. 

 

신라 하대의 사회는 통일을 이룩한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들이 왕권을 강력하게 휘두르던 절대왕권이 무너지고 난 상태였으므로 이후 신라의 37대 왕인 선덕왕이 죽으면서 왕위 계승을 두고 다시 분쟁이 일었다. 36대 왕인 혜공왕까지가 무열왕의 직계자손이고, 그 다음인 37대 선덕왕부터는 내물왕계 왕통이 이어졌다. 신라 이때 무열왕의 직계인 김주원과 내물왕계를 표방하는 세력의 김경신이 경합하였고, 김경신 세력의 우세 속에 타협이 이루어졌다. 김경신은 제 38대 원성왕에 오르고 김주원은 명주군왕에 봉해져 오늘날 강릉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원성왕대 치세에는 경주에서 기와집이 아닌 집이 없으며 숯으로 밥을 해먹었다고 전해진다. 

장보고 (780년 추정 - 846년)

원성왕은 독서삼품제를 실시하고 친국왕적 관료로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려했으나, 귀족 연립정권 구조가 유지되며 결국에는 다시 왕권 쟁탈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왕권은 계속 실추되었고, 왕위는 오래 유지될 수 없었다. 신라 하대라 불리는 150년 동안 신라의 왕은 20명이나 바뀌었고, 그 중 많은 왕이 내란으로 희생되었다.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명주군왕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왕위를 노리고 822년에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으로 하여 독립국을 선포했다. 신라의 빠른 대응으로 김헌창의 난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진압되었지만, 이는 중앙 정부의 혼란에 동요하고 있던 지방 세력이 중앙의 왕위 쟁탈전에 참가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예로 청해진의 장보고 역시 중앙 정계의 왕위 쟁탈전에 참가해 44대 민애왕을 시해하고 45대 신무왕을 즉위시키기도 하였다. 

9세기 후반 이후로 신라사회는 부패하여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사회가 타락했다. 지방을 관리하던 호족 세력은 농민을 수탈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왕실은 권력다툼과 사치와 향락에 정신이 없었다. 제 49대 헌강왕과 51대 진성여왕 시대에는 신라 사회 전반에 만연한 사치와 향락 풍조로 인해 모자란 재정은 농민들에게 중과하면서 농민은 수탈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동시에 중앙 정계의 권력다툼에서 소외된 정치세력들이 지방으로 내려가 세력을 키우면서 지방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중앙과 지방 호족의 이중 수탈에 토지를 잃은 농민이 대거 발생하면서 국가 조세 징수 대상이 줄어들며, 상대적으로 중앙 정부는 가난해져 갔다. 동시에 농민봉기가 각지에서 발생하며 신라의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신라호족분포, 우용곡 출처

초기의 농민항쟁은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비조직적 항쟁을 펼쳤고,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이 단계에서의 항쟁은 중앙 정부와 호족의 이중수탈에 항쟁하는 것이었다. 항쟁세력은 중앙은 물론 지방의 호족 세력에게도 공격을 했고, 자연히 호족 세력은 방어를 위해 지방에서 군사력을 양성하게 되었다. 호족들은 이렇게 양성한 군사력으로 항쟁세력인 농민을 공격하기도 하고, 이들을 회유하여 흡수하기도 하였다. 이제 지방 세력가들은 조직적이고 독립적인 행정체계와 상비군 성격의 군사력을 갖춘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을 호족이라고 한다. 

 

신라 하대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봉기는 신라의 통치체제를 완전히 흔들었다. 신라는 통일 신라라는 이름이 우습게도 수도인 경주 일대에서만 통치력과 조세를 징수하는 매우 좁아진 지배력을 가졌다. 이에 지방에서 상주하던 무장세력들은 각지에서 할거하여 자신의 세력을 키웠고, 봉기와 전란에 휘말린 농민들은 초적이 되거나 자신을 보호해줄 호족을 찾아서 이주하였다. 신라는 이미 국가의 틀을 유지하지 못했고, 새로운 시대를 위한 혼란의 정국이 찾아왔다. 경주 일대를 제외한 전국에서 유력 호족들이 조금씩 세력이 합쳐지면서 후삼국시대가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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