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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남북국시대

[한국사] - 후삼국시대의 시작과 왕건의 등장

by Timemapcatographer 2023.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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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후삼국시대의 시작과 왕건의 등장

수많은 호족의 등장

9세기 들어 신라는 하대라고 불리는 쇠락의 시기가 시작된다. 중앙의 지배력이 미치는 곳은 오직 경주 일대에 국한되었고 그곳을 벗어난 각 지방에서는 농민 봉기와 지방 호족들의 할거로 인하여 신라는 더 이상 국가라고 부를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 세력들 중 체계적인 조직을 정비한 곳은 견훤과 궁예였다. 이들은 각지에 산재하는 호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렇게 모인 호족들을 기반으로 체계적인 세력을 형성했고 결국에는 국가체제를 세웠다. 

후백제 시대의 세력균형

지금의 전라도를 기반으로 성장한 견훤은 무진주에서 농민 반란군을 흡수하여 자신의 세력을 형성했고, 곡창지대인 완산주 지역으로 도읍을 옮겨 900년에는 나라를 세우고 후백제를 국호로 정했다. 북쪽에 위치한 궁예는 지금의 철원 지역에서 양길등의 세력을 흡수해 국가를 형성했고, 지금의 개성인 송악 호족 왕융을 흡수하며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였다. 후에 자신의 지지세력이 확고한 철원으로 다시 읍을 옮기고 국호를 마진이라고 하였으나, 911년에는 국호를 다시 태봉으로 바꾸었다. 궁예의 후고구려는 특이하게 한반도 북쪽을 차지하면서도 왕건을 선봉으로하여 나주를 점령하며 적국인 후백제 후방에 영토를 가진 국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후고구려의 세력이 커지고, 궁예가 폭정을 일삼고 난폭해지면서 결국에는 민심을 잃자 덕망 높던 후고구려의 장군이었던 왕건이 왕으로 추대된다. 송악 호족 왕융의 아들이던 왕건은 후고구려의 왕위에 올랐고, 즉위 직후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으며 이듬해 도읍을 개성인 송악으로 옮겼다.

고려 태조 왕건, (877년 1월 31일 - 943년 7월 4일)

왕건은 송악 호족이었던 왕융의 아들로 호족적 기반에서 성장하였으며, 궁예의 부장으로 나주 등 서남해 지방을 점령한 공로로 후고구려의 시중의 자리에 올라있었다. 신라에 대해 적대적이던 궁예와 달리 왕건은 신라에 우호적이었으며 견훤과도 초기에는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920년 후백제 견훤이 신라의 합천과 초계를 공격하면서 후삼국시대의 우호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힘을 잃은 신라를 제외화고 본격적인 두 국가의 대결은 925년 조물군 전토에서 벌어졌는데, 각 군은 이렇다 할 승부를 내지 못하고 화친을 맺고 돌아섰다.

그러던 중 927년에 견훤이 갑작스럽게 신라에 침입하여 신라의 국왕 경애왕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애왕은 친고려적 성향을 띈 왕이였고, 왕건은 이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하던 중 대구 부근의 공산전투에서 후백제 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참패를 당했다. 이후 왕건은 군사적으로 상당한 수세에 몰렸으나, 930년에 있었던 안동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불리했던 상황을 반전시켰다. 고려와 후백제는 격전을 거듭하였으며 결국 왕건은 견훤의 주력부대를 격파했고,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동해안 성을 고려에 복속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를 계기로 왕건은 견훤에 대해 군사적 우위를 점했고, 후삼국시대의 통일을 위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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