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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체제와 공포정치, 피의 대숙청

by Timemapcatographer 2023.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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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체제와 공포정치, 피의 대숙청 

 

대숙청에 희생된 희생자들의 사진

스탈린이 정권을 장악한 1928년 이후 그는 정권 유지를 위한 대숙청을 단행했다. 이 대숙청은 당과 정부 그리고 국가에 대한 스탈린의 영향력과 권력을 보장해주는 도구였다. 스탈린의 사람이 아닌 1917년 이전의 볼셰비키파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몰로토프 같은 스탈린의 직속 부하 몇명을 제외하면 이름이 알려진 볼셰비키 지도자는 몇명 남지도 못했다. 이 대숙청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고는 권력을 잃고 결국에는 피살당한 트로츠키 외에는 스탈린 자신뿐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에는 스탈린의 절대적 개인독재가 시작되었다. 

 

숙청의 기간은 길게보면 스탈린 집권 전체 시기에 해당하지만, 좁은 범위로 한정한다면 대숙청은 1937년부터 1년간 시행된 숙청을 가르킨다. 1936년에 스탈린의 정적이었던 레프 카메네프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가 처형되면서 대숙청이 시작되었다. 1936년 소비에트의 최고위층 정적 몇 명만 처형당했기 때문에 일부 학자는 1937년 시작을 주장한다. 이때 소비에트의 정치, 경제, 국방, 행정,사법, 언론 등 국가 전반에 걸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독립운동가 김경천 장군

1937년 부터 1년간 사형이 집행된 인원은 68만명에 달한다. 쿨라크에서 강제 노역 중에 질병과 고문, 기아에 허덕이다 삼아한 인원 역시 10만이 넘는 인원이었다. 학계에서는 당시 희생된 인원을 약 100만에 가깝다고 추정하고 있다. 러시아어로 볼쇼이 테로르(Большой террор)로 불리는 대숙청은 스탈린의 부하인 겐흐리 야고다와 니콜라이 예조프에 의해 시행되었다. 아이러니한건 숙청을 주도했던 이 두명도 숙청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인사가 사망하면서 특히 국방분야에서 공백이 발생했다. 소비에트 적군은 장교의 숙청으로 인해서 질적 저하를 겪어야 했으며 이는 핀란드와의 겨울전쟁, 독소전쟁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 당시 숙청은 독립군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김경천 장군도 1936년 소비에트 당국에 체포되어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복역하다 1942년사망하였다.

스탈린은 공산당 기구와 수백만명의 당원들, 그리고 정치경찰을 통해서 정부기구를 감독했고, 국민들을 통제했다. 그러나 공포감만으로는 국가를 운영할 수 없었고, 영원히 국민을 통제할 수 는 없었다. 그들은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위한 열정과 부르주아들에 대한 적대감을 이용했고, 사회적으로 이질적인 사람을 희생시키면서 지지세력을 만들어냈다. 

 

특히 제 1차 5개년 계획이 종료되면서 국민 동원에 대한 구체적인 보상으로 물질적인 혜택이 돌아오자 이는 스탈린 정권에 대한 지지로 돌아왔다. 엄청난 작업량으로 소비에트 선전에 활용된 스타하노프 노동자들의 경우 새로운 의복과 자전거, 축음기와 라디오, 피아노 등으로 보상받았다. 그들이 당 집회에 초대받아 무도회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소비에트 국민들에게 선전모델로 제시되었다. 1936년 스탈린은 “인생은 더 나아졌고, 더 즐거워졌다”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도입해 정치제제를 굳건히 했다.

 

물론 소비에트 정권이 당대 시행한 잔혹한 일들에 대해서는 모순이기는 했지만, 국민들을 둘러싼 영화, 음악, 미술, 문학, 무용 등 수많은 여가 생활은 이들에게 즐거운 이야기와 장밋빛 미래를 약속했다. 정부에게 완벽히 동화된 신문은 숙청에 대한 이야기 뿐 아니라 축제와 무도회를 위한 광고를 실어 국민들을 유혹했다. 이 또한 스탈린 체제의 한 모습이었다. 오늘날의 중국이나 북한이 보이는 형태와 유사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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