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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의 1920년대 외교정책과 치체린

by Timemapcatographer 2023.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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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의 1920년대 외교정책과 치체린

 

볼셰비키는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실현시킬 현실을 원했지만 그들이 차르정부로부터 물려받은 국제적 지위와 러시아의 국가적 이해관계는 그 이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소비에트는 제정 러시아가 맺은 조약과 채무를 거부하고 비밀 외교문서를 출판하는 등 과거 차르정부와의 단절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완전한 단절은 이루지 못하고 소련의 외교정택은 전통적, 민족주의적, 제국적 팽창이라는 방향성을 띄었다. 

게오르기 바실리예비치 치체린, 1872년 11월 24일 - 1936년 7월 7일

1920년대 소비에트의 외교정책은 치체린이 사실상 담당했다. 그는 1918년 트로츠키가 전쟁인민위원이 되었을 때, 그의 보좌관으로 근무했으며 곧 외무 인민위원이 되었다. 치체린은 그 직책에서 1930년까지 근무했다. 그는 볼셰비키가 아닌 맨세비키에다가 귀족출신이었다. 그러나 국제 정세에 대한 탁월한 지식과 언어에 능통한 능력은 그를 10년 이상 소비에트 외교업무 정책을 담당하게 했다. 

 

치체린의 주된 임무는 소비에트 연방이 세계에서 인정받고, 그 지위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볼 때 공산주의 혁명은 헝가리와 독일 바이에른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것 외에는 소비에트 외부에서는 실패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은 여전히 공산주의 혁명의 세계화를 믿고 1919년 코민테른을 창립했다. 제3 인터네셔널, 또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지원했다. 이들은 각국에서 소련의 이익을 위해서, 소련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활동하였다. 동시에 러시아 내전기에 개입한 연합국에 대해서 배상금을 요구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노골적인 적대감을 갖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바라보게 되었다. 

코민테른 로고, 세계에 공산주의를 퍼트린다는 목표가 보이는 로고

러시아에서 적백내전이 종식되고 레닌의 신경제정책이 시작되면서, 소비에트는 점차 경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영국과는 1921년 3월 경제협정을 체결했다. 1922년에는 제노아에서 개최된 국제경제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해 독일과의 협정체결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소비에트 러시아와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 이후의 세계에서 고립된 나라들이었으므로 상호 이익을 위해 자연스럽게 손을 잡게되었다. 

 

1924년 영국은 소비에트 러시아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뒤이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트, 그리스, 멕시코, 중국이 그 뒤를 이었다. 1925년에는 일본과 정식으로 관계를 수립했다. 일본은 일부 경제적 이권은 남겨두었지만 마침내 사할린 섬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많은 국가들이 소비에트 러시아를 인정했고, 치체린은 소비에트 러시아를 국제 외교무대에 올려놓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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