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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사] - 1930년대 소비에트 연방의 외교정책과 파시스트 - 제 2차 세계대전의 서막

by Timemapcatographer 2023.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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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1930년대 소비에트 연방의 외교정책과 파시스트 - 제 2차 세계대전의 서막

 

소비에트 외무장관 막심 리트비노프

1920년대 소비에트 연방의 국제적인 승인과 외교관계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던 치체린 덕분에 소비에트는 1930년대 국제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스탈린과 정치국은 이러한 안정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1930년부터 1939년까지 외무 인민위원으로 근무했던 리트비노프는 열강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는 것을 목표로 활동했다. 소비에트는 국제 연맹에 가입했고 군비축소와 집단 안보를 강조했다. 

 

소비에트 연방은 국제적 인정 속에서 외교관계를 수립해 나아갔다. 폴란드, 루마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 터키 등 비교적 가까운 지역의 국가들과 일찍이 1929년 리트비노프 의정서를 만들면서 국제적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1932년에는 폴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핀란드, 프랑스와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이러한 흐름에 결국 미국도 소비에트 연방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1933년 미국내에서 공산주의 선언을 중단한다는 믿지못할 약속에 미국 역시 소비에트를 인정했다. 그리고 1934년 마침내 국제 연맹에 가입했다. 35년에는 체코와 프랑스가 소비에트와 동맹을 맺었다.

일본의 중국침략

그러나 1931년 일본이 중국의 본토를 침략하고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한 1933년은 소비에트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소비에트는 이러한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서 집단 안보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팽창에 맞서서 영국과 프랑스 미국이 소비에트 연방에 협력하다록 초점이 맞추어졌다. 1930년대 소비에트 연방과 서구의 이상한 화해무드, 장제스와의 새로운 연대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화해는 이해와 신뢰보다는 그저 편의에 기댄 일시적인 방편책에 불과해서 결국 제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스페인 내전(Guerra Civil Espanola, 1936 - 1939)

소비에트는 이러한 파시즘에 대항하여 각국의 공산당은 자국에서 파시스트의 침략에 맞서야 한다는 인민전선이라는 정책을 선언했다. 1935년 개최된 제 3인터네셔널 7차대회의 내용인 이 정책은 소비에트 정부와 더불어 파시즘을 억제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국제연맹과 열강은 이를 좌시했다.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 정복을 완료했고, 일본은 아시아 대륙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1936년 여름에는 에스파냐에서 프랑코의 파시스트 반란군이 공화정과 내전상태에 들어갔다. 소비에트는 파시즘을 제지하길 원했으나 프랑스와 영국은 망설이고 타협하면서 결국 에스파냐 공화정의 붕괴를 지켜보았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기갑병력은 프랑코를 도왔다. 그러나 에스파냐 정부를 돕기위해 파견된 것은 오직 소비에트의 장교와 기술자 뿐이었다. 

일왕 히로히토와 괴뢰 푸이, 푸이는 청의 황제였으나 중화민국 건국이후 쫓겨나 괴뢰국의 수장이 되었다.

극동에서 일본은 소비에트를 자극하는 하나의 문제거리였다. 소비에트는 아시아에서 문제를 만들지 않게하기 위해서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국을 세우는 것을 묵인했다. 그리고 이 만주국에 동청철도에 대한 지배권을 판매하면서 분쟁의 싹을 없애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일본의 팽창에 소비에트가 관대한 것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두 국가는 긴장상태에 있었으며 일본의 팽창욕이 나날이 커져감에 따라 긴장상태는 더욱 고조되었다. 소비에트의 지도자들은 일본에 대항하는 중국의 장제스에게 지원물자를 계속 보냈으며, 한인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일본의 관동군은 확장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소비에트의 극동군 역시 여기에 대항해 군비를 확장했고, 관동군도 마찬가지로 군비를 늘렸다. 1935년 부터 할하먀오 사건 부터 1936년 금창구, 타우란 사건까지 작은 국경분쟁이 있었다. 소비에트에서 숙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일본 관동군은 1938년 부터 대규모 국경분쟁을 일으킨다. 하산 호 전투, 할인골 전투가 연달아 벌어진다. 그러나 일본은 할인골 전투의 패배로 극동 지방으로의 진출을 고려해야 했고, 소비에트 역시 국제적 고립 탈피를 위해 1941년 상호간의 중립조약을 체결했다.

독일의 군국주의화

히틀러의 독일은 일본보다 훨씬 소비에트에 위협이 되는 존재였다. 히틀러는 공산주의의 파멸을 설파하면서 독일이 팽창해야할 곳으로 동쪽을 가르켰다. 독일의 호전적인 정치상황을 열강은 제지하지 못했고 1936년 독일은 라인란트 지역에 군을 주둔시켰다. 이를 라인란트 재무장이라고 한다. 히틀러는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독일 제3제국에 편입시키면서 베르사유 조약체제를 깨트렸다. 유럽대륙은 다시 혼란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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