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한국사/고려사11

[고려사] - 고려의 멸망과 위화도 회군, 역성혁명과 이성계 [고려사] - 고려의 멸망과 위화도 회군, 역성혁명과 이성계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반원정책을 추진하던 공민왕이 신돈의 실각 이후 환관에 의해 시해되었다. 고려 조정은 큰 혼란에 빠졌으나, 정계의 실력자인 이인임은 재빨리 우왕을 즉위시키고 고려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은 당시 10세에 즉위한 실권이 없는 어린 왕에 불과했다. 실질적인 권력과 국정운영은 최영, 경복흥 등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친 무장세력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들이 무신정권 때 처럼 권력을 휘두른 것은 아니나 조정의 신흥세력으로 떠올랐고, 당시 공민왕의 발탁으로 권문세족의 대항마로 떠오르던 신진사대부들은 이들이 집권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았다. 이인임은 그동안 공민왕이 추진해 오던 친명 외교정책을 버리고 단절.. 2023. 2. 1.
[고려사] - 고려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홍건적, 왜구의 침략 [고려사] - 고려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홍건적, 왜구의 침략 몽골의 부마국이 된 고려는 사회적으로 누적되어 온 모순에 휩싸여 있었다. 이를 개혁으로 바로잡고자 했지만 고려 국왕이 자신의 위치에서 개혁을 통해 사회와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하면 원이 압력을 행사하여 그 노력을 무위로 되돌렸다. 충자로 시작하던 고려의 국왕들 다음 즉위한 공민왕은 원이 고려의 국정에 직접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배제하기 위해서 정치개혁을 서둘렀다. 공민왕은 자주성을 회복하고 권문세족을 위시한 부원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본격적인 반원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반원정책이 추진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선 몽골이 약해진 것이 첫번째 이유이다. 14세기에 들어서며 마니불교에 심취한 원이 국력이 쇠약해지고 한족들이 원에 대해 저항을 시작하.. 2023. 1. 31.
[고려사] - 고려와 부원세력 권문세족, 일본정벌 [한국사] - 고려와 부원세력 권문세족, 일본정벌 1270년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천도한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무신정권을 끝낸 국왕은 스스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원이 직접적으로 고려를 통치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다루가치를 보내어 고려에 간섭하였고, 원은 필요할 때마다 고려왕을 교체할 수 있었다. 또한 고려의 국왕은 어릴 때 원에서 자라야했고, 원 황실의 공주와 결혼해야했다. 이로써 원이 영위하는 국제질서에 고려는 편입되었고, 부마국의 위치에서 그 질서에 순응하였다. 충렬왕에서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총 일곱명의 고려왕이 원간섭기에 즉위하고 폐위되었다. 원 간섭기에 고려 왕실의 호칭과 관제도 모두 원나라식으로 바뀌었다. 고려 국왕의 묘호에는 조종의 예를 올리지 못했고, 첫자는 충성할 충자를 써서 원에 .. 2023. 1. 30.
[고려사] -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제주도 항전 [고려사] -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제주도 항전 삼별초는 진도에서 여몽연합군을 맞아 용장성에서 패배하였다. 상징으로 내세운 승화후 왕온은 물론 삼별초의 지휘관 배중손도 진도에서 전사하였다. 김통정은 살아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제주도로 향하였다. 제주도는 삼별초군이 진도에 들어온 해인 고려 원종 11년인 1270년 11월 개경에서 파견된 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해 확보한 지역이다. 진도에서 들어온 삼별초군은 김통정의 지휘아래 제주의 방어시설을 구축하면서 잃어버린 제해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고려사 권 27에는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가 내성과 외성을 쌓은 뒤, 그 성을 믿고 더욱 창궐하여 수시로 나와 노략질 한다고 서술해두었다. 삼별초는 진도를 잃고 제주도를 최후 거점 삼아 여몽연합군에 대항하려 했던 것으로 .. 2023. 1. 27.
[고려사] -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진도 용장성 전투 [고려사] -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진도, 제주에서의 전투 마지막 무신정권의 권력자였던 임유무가 몽골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고려 원종에 의해 살해되면서 고려 조정은 개경으로의 환도를 준비한다. 그러나 강화도 대몽항쟁의 주역이었던 삼별초들은 몽골에게 보복 받을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개경으로의 환도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본디 좌별초, 우별초로 구성된 야별초에 신의군이 더해져 3개의 별초로 구성된 군대로 최우 집권기에 나타나 대몽항쟁의 선두에서 활약하였다. 최항 집권기에 창설된 신의군은 몽골에 붙잡혔다 돌아온 이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삼별초는 반몽적 성격이 강했으며 당시 고려의 가장 최선봉에 있는 정예부대였다. 이들의 명부가 왕에게 압수당한 상황에서 몽골군에 넘어간다면 보복을 감수해야만 했다. .. 2023. 1. 26.
[고려사] - 몽골의 침략과 강화도에서의 대몽 항쟁 [고려사] - 몽골의 침략과 강화도에서의 대몽 항쟁 몽골이 고려에 접촉한 것은 고려가 강동성에 있는 거란의 병력을 공격하기 위해 공동작전을 펼친 때이다. 1219년 고려는 몽골 병력과 함께 거란의 병력을 공격했고, 이때부터 몽골은 만주에서 거란이 갖고있던 위치를 차지하였다. 동시에 몽골은 고려에 공물을 요구하면서 고려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권력이 거란에서 몽골로 옮겨과는 과도기에 고려에 공물을 요구하던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변에서 살해당했다. 압록강변에는 거란의 잔당, 여진족, 고려, 몽골 등 다양한 민족이 산재하는 곳으로 어떤 세력이 저고여를 피살했는지 정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1231년 고려를 침략했다. 몽골은 고려를 침략하여 중원정벌 전.. 2023. 1. 25.
[고려사] - 고려 무신정권의 등장과 각지의 민란 [고려사] - 고려 무신정권의 등장과 각지의 민란 안정된 고려사회에서 문벌귀족의 모순성이 쌓여가자 결국 갈등이 폭발했다. 문벌귀족들은 고려의 모든 관직을 독점하고 권력을 휘둘러왔으나 결국 무신들이 일으킨 정변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걸었다. 무신의 난은 1170년 8월 고려 의종이 보현원에 행차한 틈을 타 무신인 정중부, 이고, 이의방 등 무신들이 쌓여있던 불만을 폭발시키면서 시작되었다. 무신들은 정변을 일으키면서 문신들을 닥치는대로 죽이면서 고려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무신의 난 직후 반란 주도자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이고와 이의방이 제거되었다. 바로 정중부가 권력을 잡았으나 계속된 내분으로 권력자가 바뀌었다. 정중부 다음에는 경대승, 이의민등이 차례로 권력을 잡았다. 이들은 일관된 정국 운영 능력이나 정.. 2023. 1. 22.
[고려사] -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이 일어난 고려의 내분과 문벌귀족의 등장 [한국사] -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이 일어난 고려의 내분과 문벌귀족의 등장 여진과의 격렬한 전쟁 끝에 고려가 금에 군신관계를 받아들이자 이후 고려 사회는 천천히 안정되어 갔다. 여진은 고려와의 화친을 잘 이행했고, 고려릐 북방은 안정되었다. 그리고 안정 속에서 고려의 최고 지배층인 문벌귀족이 형성되었다. 문벌귀족은 고려 특유의 제도인 과거제와 음서제도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문벌귀족 중에서도 유력 가문들은 혼인관계를 통해서 기반을 공고히 했으며 폐쇄적 특권층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막대한 권력을 이용해 불법적으로 개인이나 국가의 토지를 자신이 사유화 하였다. 수많은 자유 농민들이 노비로 전락하였으며 땅 또한 이들에게 흡수되었다. 이때 문벌귀족들은 섬을 소유하기도 했으며 섬에서 가축.. 2023. 1. 21.
[고려사] - 천리장성과 여진정벌, 아골타와 금의 등장 [고려사] - 천리장성과 여진정벌, 아골타와 금의 등장 거란과의 전쟁을 통해 강동 6주를 완전히 영토화한 고려는 북쪽에서의 침입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에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이 끝나자 북방의 침입에 대비해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를 천리장성 또는 고려장성이라고 한다. 천리장성은 흥화진 압록강에서 시작해서 동해한 함주(함흥) 까지 연결되었다. 천리장성으로 불린 장성은 덕종 2년인 1033년부터 평장사 유소를 책임자로 하여 건설을 시작해 정종 10년인 1044년에 완성하였다. 이에 거란은 반발하였으나 덕종과 정종은 끝까지 밀어붙여 건설하였다. 천리장성 동북 방면에는 여진족이 세력을 이루며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숙신과 말갈에서 내려온 생여진 계통의 종족이었다. 여진족은 지금의 한반도 함경도는 물론이고, .. 2023. 1. 19.
[고려사] -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과 북진정책, 거란과 전쟁 (1~3차 여요전쟁) [고려사] -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과 북진정책, 거란과 전쟁 (1~3차 여요전쟁) 고려는 국호에서 보여지듯 건국 초부터 고구려를 계승을 표방했다. 이는 적극적인 북진 정책을 국조로 삼는 기반이 되었다. 이에 따라 지금의 평양인 서경을 중시하고, 평양을 기반으로 하여 청천강 이북으로 영토를 확대하려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북진 정책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 일대에서 세력을 영유하던 거란에게는 무시할수 없는 도전이었다. 두 나라의 대립은 곧 갈등으로 나타났다. 거란은 스스로를 키타이라고 부르는 유목 민족이다. 거란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져있었는데, 당에 복속하였다. 그러던 중 당 말기의 혼란기에 질랄부에서 야율아보기라는 걸출한 리더가 나와 부족을 통일하며 거대 세력을 형성하였다. 또한 서쪽의 탕구트와 동쪽의.. 2023. 1. 17.
[고려사] - 고려의 민족통일과 고려 초 정세, 발해의 멸망 [고려사] - 고려의 민족통일과 고려 초 정세, 발해의 멸망 신라가 힘을 잃은 뒤 후삼국 시대가 열리자 상황은 후백제에 비해 고려에게 우세하게 돌아갔다. 930년 고창 전투에 이어서 934년 운주전투에서 후백제군은 고려군에게 패배하면서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갔다. 후백제 왕실 내부에서도 갈등이 일어났다. 견훤이 넷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면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더 고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동시에 926년 거란에게 멸망한 발해의 세자 대광현이 유민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하면서 고려는 발해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또한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내부의 분열로 큰아들 신검에게 피체되어 있다가 탈출하여 결국 숙적이던 고려에 의탁하였다. 나라를 세운 견훤이 상징성이 있었던 만큼.. 2023. 1. 14.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