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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삼국시대7

[한국사] - 삼국 통일전쟁과 신라, 나당전쟁의 승리와 통일신라 [한국사] - 삼국 통일전쟁과 신라, 나당전쟁의 승리와 삼국통일 6세기에 들어오면서 고구려, 신라, 백제 3국간의 전쟁은 계속되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7세기에 접어들면서 전쟁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642년에 새로이 즉위한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하여 국경의 성 40여 곳과 대성인 대야성까지 함락시켰다. 또한 주변의 작은 성들을 함락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지속적인 압박에 쇠퇴해가던 백제의 전성기를 찾는듯 했다. 이에 신라의 김춘추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구려의 평양성에 방문하여 대막리지 연개소문을 알현하였다. 신라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서 고구려와 일시적인 동맹을 맺고자 하였는데, 고구려가 동맹의 대가로 한강유역을 요구하자 협상은 결렬되었다. 고구려와의 동맹 실패로 고구려 남부전선에서 신.. 2022. 12. 29.
[한국사] - 고구려 당나라 전쟁과 안시성 / 고당전쟁 / 수당전쟁 [한국사] - 고구려 당나라 전쟁과 안시성 / 고당전쟁 / 수당전쟁 고구려 정벌에 나라의 국운을 걸었던 수나라가 멸망하고 그 뒤를 이어서 당나라가 중원의 패자 등장했다. 당은 고조 이연이 618년 건국하였고, 그 이후 잠시동안 혼란해진 정국을 다스리고 내치에 신경을 쓰느라 동아시아에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고구려 역시 수와의 전쟁으로 소모한 막대한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당과의 친선관계에 돌입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다가 망한 걸 직접 목도한 당 역시 고구려를 무조건 적대시 한다는 것은 망국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 태종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당 내부에서 일어난 군사적인 움직임을 모두 평정한 당태종은 북에서 호시탐탐 중국을 노리는 동돌궐까지 복속시켰다. 또한 서.. 2022. 12. 14.
[한국사] -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 수의 멸망 / 고수전쟁 / 수당전쟁 [한국사] -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 수의 멸망 / 고수전쟁 / 수당전쟁 신라가 백제를 배신하고 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한반도 남쪽에서는 고구려, 신라, 백제의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 사이 중국에서는 불열되어 있던 5호 16국의 시대가 끝나고 유목민의 후손인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다. 수나라는 589년에 전국을 통일하고 군사력을 이용하여 대외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하였다. 수나라는 고비사막 이북에서 중원을 향해 압박하던 돌궐을 여러차례 정벌하고 이간책까지 사용하여 돌궐을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리시켜 약화시켰다. 강성하던 돌궐의 세력이 분열되며 약해지자 수나라는 이번에는 기수를 돌려 북쪽이 아닌 동쪽의 국가 고구려를 약화시키려 하였다. 중원을 차지한 패자가 중원 근처 거대세력을 정복하는 일은 매우 당연한.. 2022. 12. 8.
[한국사] - 신라의 발전과 부흥, 진흥왕의 영토확장 [한국사] - 신라의 발전과 부흥, 진흥왕의 영토확장 신라는 삼국시대를 이루는 고구려, 백제보다 전성기가 늦었다.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탓에 중국과의 교류가 적었고, 삼국 중 가장 발전이 뒤떨어졌던 신라는 6세기에 접어들면서 발전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6세기 초 무렵 지증왕 때에는 우경을 실시하며 농업생산이 크게 늘어났다. 농기구가 개량되고, 소를 농사에 사용하는 우경이 본격화 되면서 생산량이 증대되었고, 또한 귀족들의 무분별한 순장을 금지하면서 노동력의 무의미한 손실이 적어졌다. 또한 지증왕대에 국호 신라를 정식으로 사용하였으며 대군주를 뜻하던 마립간이라는 칭호 역시 중국식 칭호를 받아들여 왕(王)으로 바꾸었다. 지증왕이 고대국가 신라의 기틀을 세웠다면 그 다음 왕인 법흥왕은 국가 내적인 체제를 완비하.. 2022. 11. 26.
[한국사] - 백제의 천도와 쇠락, 웅진시대와 사비시대 백제는 국가의 정비가 대략적으로 마무리되는 4세기에 백제는 관등제를 확충하고, 왕위계승도 부자상속으로 바꾸어 위계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4세기 후반, 5세기 초반에 확충된 군사력으로 남방정책을 추진하자 백제는 급속히 쇠락하였다. 그러다가 475년 지금의 위례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도읍을 천도할 수 밖에 없었다. 백제의 웅진천도는 고구려의 한성점령에 의해 단시간에 이루어진 급작스러운 천도였다. 이러한 웅진천도의 배경에는 당시 개로왕대 백제에서는 무모한 권력행사로 백제 지도층 분열이 원인였다. 게다가 백제가 고구려와 북위를 둘러싸고 펼친 외교전에서 실패한 것이 주효했다. 백제의 개로왕은 472년 북위에 고구려를 공격할 원군을 요청하였는데 이러한 백제의 외교는 고구려를 자극하는 결과를 낳.. 2022. 11. 7.
[한국사] - 백제의 전성기 [한국사] - 백제의 전성기 백제는 8대 고이왕대를 거쳐 4세기 근초고왕 때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고이왕은 백제의 체제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에 힘써 백제의 기틀을 잡고 발전을 이끌었다. 이러한 백제의 성장은 고이왕 이후의 왕들인 책계왕, 분서왕, 계왕으로 이어지며 이들의 노력은 13대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대대적인 정복사업으로 나타났다. 근초고왕은 동쪽 낙동강 유역과 전라도, 지리산 일대에서 가야의 소국을 정복하고 영산강 유역의 마한 소국들을 정복했다. 가야를 흡수하므로 인해 영토를 남해안까지 확대하였다. 당시 전라도 지역은 여전히 마한의 전통을 가진 소국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백제의 중앙집권 체제에 들어오지 않은 소국이 산재하고 있었다. 이곳에 근초고왕은 대외팽창을 통해 백제의 영향.. 2022. 10. 6.
[한국사] - 고구려의 영토팽창과 전성기, 광개토대왕의 등장 고구려는 백제와의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앙의 전사 이후 내부적인 정비를 마치고 다시금 영토 팽창을 시작했다. 이는 당시 중국이 분열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삼국간의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으면서 5세기에 최전성기를 펼쳤다. 이때가 그 유명한 광개토왕, 장수왕, 문자왕의 치세로 고구려는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삼국시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18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안정된 정치 기반을 바탕으로 대대적인 정복사업을 펼쳤다. 북으로는 거란의 일파인 비려를 정멀하고 요하를 넘어 요동을 점령해 영유권을 확보했다. 고구려는 이 원정에서 600-700여개에 달하는 촌락을 파괴했다. 북쪽 변경을 정비한 이후 기수를 남으로 돌렸다. 고국원왕이 근초고왕에 의해 .. 2022.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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