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한국사65 [한국사 연표] - 한국사 연표 (삼국시대, 고려사, 조선사, 근현대사 - 23년 3월) [청동기-철기시대] BC 50: [한국사] - 한국의 청동기 시대와 고조선 BC 7C: [한국사] - 고조선의 등장과 발전 BC 108: [한국사] - 고조선의 발전과 한제국의 조선침략 BC 37: [한국사] -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BC 18: [한국사] - 백제의 성립과 마한 BC 57: [한국사] - 사로국의 등장과 신라의 건국, 발전 AD 42: [한국사] - 가야 제국(諸國)의 성립과 쇠락 [삼국시대] AD 4C: [한국사] - 고구려의 영토팽창과 전성기, 광개토대왕의 등장 AD 5C: [한국사] - 백제의 전성기 AD 475: [한국사] - 백제의 천도와 쇠락, 웅진시대와 사비시대 AD 6C: [한국사] - 신라의 발전과 부흥, 진흥왕의 영토확장 AD 607: [한국사] - 고구려와 수나라 .. 2023. 4. 4. [현대사] - 신군부와 전두환의 정권 장악과 몰락, 6월항쟁과 민주화 [현대사] - 신군부와 전두환의 정권 장악과 몰락, 6월항쟁과 민주화 육사 11기 출신 전두환은 5.16 쿠테타 당시 국가혁명위원회에 가담하고 자신의 후배인 육사생도들의 쿠테타 지지 퍼레이드를 조직하여 박정희의 눈에 들었다. 그는 박정희의 비호아래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에 참여하여 그 지도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군사독재에 적극 협력한 인사로 1976년에는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1979년에는 육군본부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했다. 거기에 10.26사태 직후에는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김재규를 구속하고 수사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육군참모총장을 김재규의 협력자라는 구실로 체포한 12.12사태까지 일으키면서 군부를 장악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는 박정희의 비호아래 커온 군부독재정부의 그림자.. 2023. 3. 28. [현대사] - 신군부와 12.12쿠테타,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 민주화운동 1979년 10월 26일 부마항쟁에 대해 강경진압을 지시하던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피살되었다. 김재규는 혼란상황을 수습하고 정권을 잡으려 하였으나 곧바로 체포되고, 국가의 수장을 잃은 군부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갑작스러운 계엄 업무를 수행하는 군부는 겉으로는 정치적인 중립을 선언하고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민간에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는 무력으로 군부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다. 이들은 하나회라는 이름으로 박정희의 비호 아래 활동하던 군내 사조직이었다. 이때의 사건을 계기로 군에서는 사조직 형성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이들이 일으킨 쿠테타를 12.12사태라고 부른다. 이어서 12월 22일에는 계엄사령관을 체포.. 2023. 3. 25. [현대사] - 5.16 군사정변과 박정희의 등장, 유신체제와 김재규 [현대사] - 5.16 군사정변과 박정희의 등장, 유신체제와 김재규 민주화에 대한 염원으로 이승만 독재와 부정선거에 대항해 민주화를 이뤄낸 4.19 혁명 이후, 대한민국에는 민주당이 선거에서 승리하며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민주당이 이행하는 개혁이 여러 현실적인 문제에 막혀 지지부진하자 민중 사이에서는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때 사회의 혼란스러움을 기회로 삼아 박정희 소장을 주축으로하는 일부 군인들이 반공과 경제개발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1961년 5월 16일의 일이었다. 이를 5.16 군사정변 또는 5.16 군사 쿠데타라고 부른다. 이 사태로 인해 4대 대통령 윤보선은 하야했다. 이는 대한민국의 헌법적 질서를 무시하고 무력을 앞세운 폭력적 정권수탈이었다. 총칼을 앞세운 군인들은 정권을 .. 2023. 3. 23. [현대사] -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이승만의 하야: 현대사의 시작 / 대한민국 민주화의 시작 [현대사] -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이승만의 하야: 현대사의 시작 / 대한민국 민주화의 시작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 10년,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이 10년간 집권하였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한국전쟁, 사사오입 개헌 등을 거치면서 권력을 독점화하려 했고, 1956년 3차 연임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이승만의 나이는 70세가 넘은 나이였다. 3대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고,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을 후보로 내세웠다. 야당인 민주당은 조병옥을 대통령 후보로 장면 부통령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조병옥이 갑작스럽게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 단독후보로 당선이 정해졌고, 세간의 관심은 부통령 선거에 집중되었다.. 2023. 3. 22. [근대사] - 북한의 남침과 6.25 전쟁의 시작 (한국전쟁) [근대사] - 북한의 남침과 6.25 전쟁의 시작 (한국전쟁) 1948년 유엔의 총선거를 거부한 북한은 소련의 괴뢰정권이 들어섰고, 남한은 단독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남한과 북한에 각각의 정부가 설립되어 존재하는 분단의 상황에서 각 정부는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러던 중 1949년 북한의 김일성이 신년사에서 국토완정론을 주장하면서 남북한에는 긴장관계가 형성되었다. 이에 이승만은 김일성의 발언에 북진통일론으로 맞섰다. 서로의 영토를 공격한다는 가정아래 남북의 정부는 각기 미국과 소련의 군사적 지원 아래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특히 미군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자 이러한 군비경쟁은 더욱 치열해 졌다. 북한은 중국의 국공내전과 항일무장투쟁을 통해 수많은 실전경험을 쌓은 조선의용군 수만명을 인민군으로.. 2023. 3. 21. [근대사] -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과 총선거, 한반도 분단의 고착 [근대사] -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과 총선거, 한반도 분단의 고착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이 1945년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38선을 경계로 한반도에는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들어왔다. 이들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구실로 실질적인 한반도의 지배세력이 되었다. 38선 위쪽의 북한은 소비에트의 간접지배로, 남한의 미군정은 직접지배를 통해 통치하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는 한국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 미국과 영국, 소비에트 3국 외무장관이 모여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를 모스크바 3상회의라고 한다. 이 회의에서는 한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향후 5년간 신탁통치를 한다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러한 조치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36년간의 일본제국주의 .. 2023. 3. 20. [근대사] - 한반도 분단과 미군의 한반도 진주, 미군정 치하 민중의 삶 [근대사] - 한반도 분단과 미군의 한반도 진주, 미군정 치하 민중의 삶 1945년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서 한반도로 들어온 미군은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점령군으로서 38선 이남의 지역에서 군정을 실시하였다. 미군정이 정식으로 실시되자, 남한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실질적인 행정조직을 마련한 건국준비위원회나 귀환을 준비하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한국인의 정치집단들은 상황이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미군정은 한국인이 조직한 정치집단을 모두 배제하고 미군정만이 유일한 공식 정치단체임을 선포하였다. 이는 사회주의적 단체의 설립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미군정은 경제체제는 일제가 실시하던 전시 통치제제에서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당시 시대적인 상황과 남한만의 특수한 .. 2023. 3. 17. [근대사] - 일제의 패망과 광복, 미군정과 혼란의 해방정국 [근대사] - 일제의 패망과 광복, 미군정과 혼란의 해방정국 1945년 8월 15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맞은 일본은 일왕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총옥쇄와 본토사수를 외치던 일제는 결국 연합국에 무릎꿇었다.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제로 침탈한지 35년만의 일이었다. 연합국에 항복한 일본은 식민지를 잃게 될 것이었고, 한국인들은 광복을 맞이했다. 해방과 더불어 한인들을 이끌어갈 새로운 정치를 위해 다양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가장 먼저 움직인 인물은 여운형이었다. 여운형은 국내에서 활동하면서 국내에서의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해두고 있었고, 이미 1년전부터 일제의 패망을 예측하고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어 국내에서 항일 세력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게다가 노동자와 농민을 대.. 2023. 3. 12. [독립운동사] - 1930년대- 40년대 무장독립투쟁과 한국광복군의 활동 [독립운동사] - 1930년대- 40년대 무장독립투쟁과 한국광복군의 활동일제가 침략전쟁에 미쳐 중국대륙과 동남아로 침략을 확장하자 만주와 중국 일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도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개시하였다. 독립전쟁 개시에 앞서 독립운동 단체들은 1920년 후반 부터 효율적인 전쟁을 하기위해 독립운동 단체 세력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35년 결성된 조선민족혁명당은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의열단,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등 다양한 단체가 참가하여 결성되었다. 그러나 내부의 주도권 다툼으로 일부 민족주의 계열이 탈퇴하고 반쪽짜리 통합에 그치고 말았다.1937년 8월 임시정부 주도의 한국 광복운동단체 총연합회가 결성되어 민족주의 세력의 결집을 이끌었고, 11월.. 2023. 3. 11. [근대사] - 일제의 만주침략과 만주국 성립, 한반도 병참기지화 정책 [근대사] - 일제의 만주침략과 만주국 성립, 한반도 병참기지화 정책 일제는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서 만주를 침략한다. 일제는 군국주의 국가답게 대륙진출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일찍이 1910년대 부터 간도에 병력을 보내는 등의 침략행위를 끊임없이 저질렀으나, 193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침략카드를 꺼내며 만주국 설립이라는 강경책을 꺼내든 것이다. 만주를 침략해 청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내세워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운 일본군은 그 야욕을 드러내 1937년에는 중일전쟁까지 일으켰다. 이는 일제의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쟁 초기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중국의 도시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는 도시라는 점과 철도라는 선.. 2023. 3. 10. [독립운동사] - 독립군의 항쟁과 독립전쟁, 1920년대 무장항일투쟁 [독립운동사] - 독립군의 항쟁과 독립전쟁, 1920년대 무장항일투쟁 1920년대 간도와 만주지방에서는 독립군 단체가 형성되며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시작하였다. 국외 지방에는 경술국치를 전후로 많은 독립지사들이 망명하여 독립군기지건설을 추진했는데 간도와 만주도 그 지역들 중 하나였다. 이곳은 국내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과 이미 한인들이 많이 건너가 살고 있다는 여건 때문에 비교적 쉽게 독립군 근거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특히 북간도는 강 하나만 건너면 바로 국내로 진입할 수 있는 근거리였기에 이러한 독립군 근거지로서 떠올랐다. 근거지에 한인들의 사회가 구축되고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1920년대 들어 독립군 무장 단체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대표적인 한인의 근거지로는 용정, 국자가, 봉.. 2023. 3. 8. 이전 1 2 3 4 ··· 6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