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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 몽골제국 이후의 동아시아와 오이라트 [중앙아시아사] - 몽골제국 이후의 동아시아와 오이라트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는 1368년에 몽골인들은 대도와 상도를 명군에게 함락당했다. 몽골인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던 중국에서의 영토를 상실하고 초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북원이 건국되었지만 몽골제국은 1487년 다얀 칸이 즉위하여 재통일을 할때까지 120년간 내전 상태로 들어간다. 토곤 테무르 칸은 명군이 응창을 기습할때 가까스로 몸을 피해서 측근만을 이끌고 막북 몽골 초원의 카라코룸으로 대피했다. 토곤 테무르 칸을 북원의 1대 칸으로 보기도 한다. 1370년 사망한 토곤 테무르 칸을 이어 아유시리다라 칸은 전열을 가다듬어 명군의 군사적 공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한다. 명나라 홍무제는 1372년 봄 15만 대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서 출병시켰다. 각.. 2022. 7. 11.
[중앙아시아사] - 몽골 제국의 쇠퇴와 종말 [중앙아시아사] - 몽골 제국의 쇠퇴와 종말 세계를 호령했던 몽골제국의 세계지배는 사실상 14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붕괴하기 시작했다. 제국 붕괴의 조심은 본격적으로 지배체계가 무너지기 20~30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각 울루스에서는 칸의 권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차가다이 울루스에서는 1326년 케벡 칸이 사망한 뒤 극히 짧은 기간만을 통치하고 단명한 칸들이 줄을 이었으며 타르마시린 칸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폐위되기도 했다. 내부적인 갈등과 균열로 인해서 차가다이 울루스는 1340년대 후반 동서로 분열되었다. 훌레구 울루스 또한 마지막 군주 아부 사이드의 20년 치세동안 어느정도 안정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이는 권신들의 세력 균형을 위한 일시적인 안정이지 울루스 칸의 권력이 강해서가.. 2022. 7. 7.
[중앙아시아사] - 몽골울루스의 칸국들: 주치 울루스 (킵차크 칸국) 징기즈칸은 주치를 장자로 규정하였으나 그에게 혈통문제는 계속해서 문제화 되었다. 그가 실제로 징기즈칸의 자식인지에 대한 논쟁은 주치를 일찌감치 칸 울루스의 후계자 선정 문제에서 떼어놓았다. 주치는 우구데이와 혈통 문제로 크게 다투고 모욕을 당한 후 카안 울루스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중앙아시아에 주치 울루스, 킵차크 칸국을 세우고 그곳을 통치한다. 주치의 아들 바투는 1230년대 서방원정을 지휘한다. 서방원정의 결과로 킵차크 초원을 정복하고 러시아를 속령화 하였다. 우랄 산맥을 중앙에 둔 상태로 거대한 영역을 다스리게 된 주치 울루스는 이후에 역사에서 킵차크 한국, 킵차크 칸국으로 불리게 된다. 주치 울루스는 두개로 나누어 좌익과 우익으로 통치되었다. 좌익은 주치의 맏아들 오르다가 첫 칸을 맡았고 우익.. 2022. 6. 21.
[중앙아시아사] - 몽골의 칸국: 차가타이 울루스 [중앙아시아사] - 몽골의 칸국들: 차가타이 울루스 징기스칸이 1207년 부터 1211년 자제 분봉을 실시해서 차가다이가 받은 최초의 봉지는 알타이 산지 부근이었다. 이 알타이 산지 부근에 받은 초봉지는 이후에 서방원정으로 크게 확장되어 알말릭과 쿠야스 부근에 다다르게 되었고 곧 사마르칸드와 부하라에 이르는 지역까지 모두 포괄하게 되었다. 차가타이는 징기즈 칸의 둘째 아들이고, 차가타이 칸국의 칸을 처음으로 자처한 훌레구는 그의 손자였으며, 차가타이 칸국의 제3대 칸이 되는 예수 몽케는 그의 아들이었다. 차가타이 울루스는 울루스들 사이에서 중앙에 자리잡게 되어 중앙 울루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차가타이 울루스의 이러한 입지조건은 몽골 제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변동에 계속해서 영향을 받았고 칸의 권력 안정.. 2022.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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