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소비에트19 [러시아사] -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개혁과 쿠테타 [러시아사] -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개혁과 쿠테타 1985년 소비에트의 지도자로 등장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비에트가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소비에트와 동유럽에서 전개되던 사건들은 소비에트 지도부는 물론이고 모든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를 실망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소비에트 경제의 낮은 경제성장률은 비판론과 결부되어 그에게 사회 개혁의 의무를 수행하게 만들었다.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에 임명되었을 때 우선 소비에트 내외에 산적한 문제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면서 위기에 대응하고자 했다. 소비에트에 산적한 문제는 우선 낮은 경제성장률, 생활수준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 암울한 농업 상황, 제조업의 질 하략, 과학 기술분야에서 세계의 발전 수준에 뒤떨어지기 시작한 것, 국.. 2023. 4. 22. [러시아사] - 프라하의 봄과 아프가니스탄 침공, 소비에트의 폭력적 대응 2 [러시아사] - 프라하의 봄과 아프가니스탄 침공, 소비에트의 폭력적 대응 2 동유럽의 문제는 끊임없이 불거져나왔다. 헝가리 혁명을 진압한 후 12년간 소비에트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제도적 다양성과 이데올로기적 다양성을 가진 공산주의 다원주의를 용인하려했다. 그러나 이는 동유럽 여러 국가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포괄하지는 못했다. 1968년 프라하에서는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체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경기침체에 시달리고 있었다. 프라하의 봄은 이러한 경제침체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는 개혁요구, 민주화 요구 운동이었다. 프라하의 봄에 의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권력독점을 포기한다고 말했고, 경제 수정주의와 민주주의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동.. 2023. 4. 21. [러시아사] - 폴란드와 헝가리의 혁명, 소비에트의 폭력적 대응 [러시아사] - 폴란드와 헝가리의 혁명, 소비에트의 폭력적 대응 1956년은 소비에트에게 있어 놀란만한 해였다. 스탈린 치하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던 티토와 유고슬라비아의 노선은 오류를 낳았고, 스탈린의 후임자인 후르쇼프와 불가닌은 이 오류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위해 베오그라드를 방문했다. 이러한 부드러운 정책에 반대했던 외교장관 몰로토프는 셰필로프로 교체되었다. 흐루쇼프의 베오그라드 방문과 더불어 그가 했던 1956년의 2월 연설은 동유럽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모스크바가 스탈린의 오류와 범죄를 인정한 것은 체제 개혁을 위한 요구를 허락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변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격렬하게 터져나왔다. 폴란드에선 1956년 6월 하순경에 노동자들이 포즈난 시의 거리로 쏟아져.. 2023. 4. 17. [러시아사] - 흐루쇼프의 실각과 새로운 통치자 브레즈네프 [러시아사] - 흐루쇼프의 실각과 새로운 통치자 브레즈네프 여러모로 짧았던 흐루쇼프의 통치기간은 오랜 혁명 정치사의 정점이었다 흐루쇼프는 국내외적으로 자신의 통치 방향을 ‘사회주의 사회 건설'로 잡았고, 그의 후계자들은 그와는 다른 정치적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흐루쇼프가 개혁과 변덕스러운 캠페인을 보여주었다면 후계자들은 혁명이 아닌 질서를 바라며 통치했다. 1964년 새롭게 구성된 소비에트의 집단지도부는 브레즈네즈를 필두로 구성되었으며, 1917년 이후 성년이 된 최초의 세대였다. 이들은 혁명 당시에는 어린아이였고, 대부분 기술교육을 받았다. 모든 지도자들은 대숙청을 통해 당의 고위직으로 진입했고 빠르게 승진했다. 대체적으로 그들은 안정된 권력과 효율적인 경제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실용적인 인물들이.. 2023. 4. 12. [러시아사] - 스탈린 이후의 소련, 스탈린의 죽음과 흐루쇼프의 등장, 크렘린의 권력투쟁 [러시아사] - 스탈린 이후의 소련, 스탈린의 죽음과 흐루쇼프의 등장, 크렘린의 권력투쟁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1953년 3월 5일 사망하였다. 그의 공식적인 사망원인은 뇌졸중이었다. 스탈린의 죽음 이후에 크렘린은 3일간 침묵을 지켰으며, 결국 독재자의 서거를 발표하였을 때 새로운 지도부는 인민들의 통합과 단결을 강조하며 자신들이 국가를 통치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말렌코프가 등장하여 가장 중요한 직책인 당 서기장직과 수장자리를 겸임하였다. 말렌코프 다음으로는 베리야와 몰로토프가 그 다음 순서를 차지하여 독재자가 죽고 난뒤 소련의 삼두체제를 구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삼두체제는 오래가지 않았다. 3월 준순이 되자 말렌코프는 당의 최고위층이긴 하지만, 당 서기장식을 사임한다고 발표하였다. 당.. 2023. 4. 11. [러시아사] - 제 2차 세계대전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피해 [러시아사] - 제 2차 세계대전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피해 소비에트 러시아는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엄청난 인명 손실과 물질적인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 전역에서 적군 수백만명이 사망했을 뿐 아니라, 수백만명의 민간인 역시 이리저리 바뀌는 전선과 독일군의 연이은 침공에 희생되었다. 러시아의 희생자 수는 계속해서 추산되고 있는데 최근의 수치는 약 2,500만명에 달했다. 소비에트의 시민들은 노동자로, 전쟁 포로로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죽어갔다. 나치는 동부전선에서 영토 합병을 위한 전멸작전을 펼쳤기에 대량 총살과 집단 처형장으로 주민을 보내는 일은 흔하게 일어났다. 게다가 그 모든 시련을 겪고 살아났다 하더라도 생존자들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전쟁은 러시아에 있어 비극적인 인적 손실이었다... 2023. 1. 23. [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과 제 2차 세계대전: 소비에트 적군의 반격과 베를린 진격 [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과 제 2차 세계대전: 소비에트 적군의 반격과 베를린 진격 1943년 여름 독일군의 공격이 소강상태에 들어서자 소비에트 적군은 다시 반격을 시작했다. 적군은 세력을 규합해서 침입자들을 영토에서 몰아내고 결국에는 부다페스트, 빈, 프라하, 베를린까지 진격했다. 적군의 진격은 수도 베를린을 점령하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이루어졌다. 적군의 압도적인 승리는 독일군의 전력이 모두 소진되었기에 가능했다. 독일군의 탄약과 물자는 사실상 소진되었고 인력구성 역시 독일인이 아닌 루마니아 인이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지휘권을 가져간 히틀러는 계속해서 실수를 저질렀다. 너무 늦은 시기까지 후퇴를 허락하지 않았고 제때 지휘가 전선에 도착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적군은 여전히 막대한 손실을 입으면서 .. 2023. 1. 16. [러시아사] - 1938년 이후 소비에트 외교정책과 제 2차 세계대전 [러시아사] - 1938년 이후 소비에트 외교정책과 제 2차 세계대전 독일에 대해서 유화책을 펼쳤던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했다. 그들은 1차 대전이 일어났던 상황처럼 독일을 억누르는 것은 곧 전쟁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독일에 대해서 유화책을 펼쳤다. 독일도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고, 체코 슬로바키아에서 독일 민족이 거주하는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합병하려는 히틀러는 이를 이용했다. 영국의 체임벌린과 프랑스의 달라디에는 뮌헨으로 넘어가서 히틀러 및 무솔리니와 합의했다. 이는 소련을 염두에 둔 행동이라기 보다 전쟁을 극도로 경계한 행동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이러한 서구의 처리방식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졌다. 소비에트는 회담에 초청받지 못했고, 서구의 진정성을 .. 2023. 1. 8. [러시아사] - 1930년대 소비에트 연방의 외교정책과 파시스트 - 제 2차 세계대전의 서막 [러시아사] - 1930년대 소비에트 연방의 외교정책과 파시스트 - 제 2차 세계대전의 서막 1920년대 소비에트 연방의 국제적인 승인과 외교관계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던 치체린 덕분에 소비에트는 1930년대 국제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스탈린과 정치국은 이러한 안정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1930년부터 1939년까지 외무 인민위원으로 근무했던 리트비노프는 열강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는 것을 목표로 활동했다. 소비에트는 국제 연맹에 가입했고 군비축소와 집단 안보를 강조했다. 소비에트 연방은 국제적 인정 속에서 외교관계를 수립해 나아갔다. 폴란드, 루마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 터키 등 비교적 가까운 지역의 국가들과 일찍이 1929년 리트비노프 의정서를 만들면서 국제적 인정.. 2023. 1. 7. [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체제와 공포정치, 피의 대숙청 [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체제와 공포정치, 피의 대숙청 스탈린이 정권을 장악한 1928년 이후 그는 정권 유지를 위한 대숙청을 단행했다. 이 대숙청은 당과 정부 그리고 국가에 대한 스탈린의 영향력과 권력을 보장해주는 도구였다. 스탈린의 사람이 아닌 1917년 이전의 볼셰비키파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몰로토프 같은 스탈린의 직속 부하 몇명을 제외하면 이름이 알려진 볼셰비키 지도자는 몇명 남지도 못했다. 이 대숙청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고는 권력을 잃고 결국에는 피살당한 트로츠키 외에는 스탈린 자신뿐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에는 스탈린의 절대적 개인독재가 시작되었다. 숙청의 기간은 길게보면 스탈린 집권 전체 시기에 해당하지만, 좁은 범위로 한정한다면 대숙청은 1937년부터 1년간 시행된 숙청.. 2023. 1. 4. [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의 1920년대 외교정책과 치체린 [러시아사] - 소비에트 연방의 1920년대 외교정책과 치체린 볼셰비키는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실현시킬 현실을 원했지만 그들이 차르정부로부터 물려받은 국제적 지위와 러시아의 국가적 이해관계는 그 이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소비에트는 제정 러시아가 맺은 조약과 채무를 거부하고 비밀 외교문서를 출판하는 등 과거 차르정부와의 단절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완전한 단절은 이루지 못하고 소련의 외교정택은 전통적, 민족주의적, 제국적 팽창이라는 방향성을 띄었다. 1920년대 소비에트의 외교정책은 치체린이 사실상 담당했다. 그는 1918년 트로츠키가 전쟁인민위원이 되었을 때, 그의 보좌관으로 근무했으며 곧 외무 인민위원이 되었다. 치체린은 그 직책에서 1930년까지 근무했다. 그는 볼셰비키가 아닌 맨세비키에다가 귀족출.. 2023. 1. 3. [러시아사] - 스탈린의 경제정책 - 제 2차, 제 3차 5개년 계획과 역사의 평가 [러시아사] - 스탈린의 경제정책 - 제 2차, 제 3차 5개년 계획과 역사의 평가 제 1차 5개년 경제계획의 성공이라는 자평에 말미암아 다음 계획들도 진행되었다. 1933년부터 1937년 까지 지속된 제 2차 5개년 계획과 독일의 공격으로 1941년 중단된 제 3차 5개년 계획은 1차때의 목표와 방법을 반복하는 계획이었다. 농업집단화를 이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국가의 인력과 자원을 최대로 동원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국민들은 경제계획이 진행되는 8년동안 전시상황과 같은 삶을 살아야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2차, 3차 성공이라는 연방정부의 발표를 들을 수 있었다. 제 2차 5개년 계획은 1차 계획보다 전문적으로 계획되어 생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복잡한 공작기계나 정.. 2022. 12. 31. 이전 1 2 다음 728x90 반응형